만약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평생 한 가지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희미해지고 있는 때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물론 평생 한 곳에서 일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직업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지만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살던 한 남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어우러진 영화, 클로드 라 롱드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2019). 그 누구보다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던 남자의 이야기가 무척 가슴 아프게 그려진 작품입니다. 개봉 당시 일흔아홉이었던 노장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 경이 극 중 평생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살아온 '헨리 콜'의 내면을 완벽히 연주했습니다.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인 영화답게 영화 속에서 바흐, 베토벤, 슈만, 쇼팽, 리스트 등 서양 음악사의 주옥같은 27곡의 피아노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의 모든 피아노 작품은 우크라이나의 피아니스트 세르히 살로프가 연주했습니다. 그가 연주한 피아노 선율은 인생의 마지막을 향하는 한 남자의 눈물과 함께 흘러갑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코다Coda〉입니다. 이탈리아어로 꼬리 부분을 뜻하는 코다는 보통 서양 음악 작곡 양식에서 마지막 부분을 뜻합니다. 흔히 곡의 앞부분에 등장했던 주제 선율이나 형식 등이 곡의 말미에 다시 한 번 변형되어 등장할 때 코다가 시작된다고 이해하면 되는데요.

코다가 시작되면 곡이 거의 끝나간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헨리 콜의 인생 후반부가 마치 코다처럼 끝을 향해 처음과 같이 연주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의 제목을 코다로 지었던 건 아닐까요?

모든 것을 잃은 남자

영화의 첫 장면은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 쓴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음악이 없는 삶은 오류일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꽉 찬 객석을 바라보며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베토벤을 연주하던 헨리 콜은 연주 도중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는 와중에도 그는 곡을 끝까지 연주하지요.

아슬아슬한 연주가 계속되며 불안한 분위기가 내려앉습니다. 금방이라도 도망가버릴 것 같은 헨리의 표정이 무척 슬퍼 보이기도 하고요. 끝내 오른손 부분의 악보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연주를 마친 헨리 콜은 무대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세계적인 노장 피아니스트가 숨을 고르며 불안해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아픔뿐입니다.

이날 무대는 아내의 죽음 이후 3년간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 헨리 콜이 무대 공포증을 참아내며 어렵게 오른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증상을 완전히 이겨낸 것이 아니었어요.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던 도중 악보를 까먹고 다시 연주하거나, 결국 다음 곡 연주를 포기하고 맙니다.

이날 이후 헨리에게 〈뉴요커〉의 기자 헬렌 모리슨(케이티 홈즈 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따듯한 마음을 가진 헬렌을 통해 헨리는 다시 한 번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설 자신감과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사실 헬렌은 이미 헨리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15년 전 헬렌이 콩쿠르에 떨어졌을 때 헨리가 위로해주었고, 그날 이후 헬렌의 마음속에 헨리에 대한 동경이 싹텄던 것이죠. 헬렌은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고백하는데요. 이런 추억의 연결고리 때문일까요. 헬렌은 헨리에게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헨리는 냉정하게 거절했어요. 헬렌은 헨리에게 꽃다발을 보내고, "지나가다 들렀어요"라는 싱거운 농담과 함께 헨리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헬렌의 노력에 헨리도 결국 마음을 열고 인터뷰를 결심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피아니스트와 기자로 다시 만납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의 작은 벤치에 앉아서, 자전거를 타면서, 그리고 남프랑스의 작은 집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길고 긴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헨리는 헬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려줍니다. 어린 시절의 슬픔부터 아내를 잃은 고통까지, 그가 겪었던 시간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습니다. "10대에 슈만이 없었다면 난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지금은 바흐와 베토벤의 축복으로 매일 살고 있지만요"라고 말하는 헨리의 모습을 헬렌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사랑의 발견

자주 보면 정든다는 말처럼, 인터뷰를 위해 만남을 이어가던 그들 사이에 애틋하고 수줍은 사랑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헬렌이 헨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거든요.

하지만 둘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헨리가 홀로 스위스의 질바플라나에 머물며 헬렌이 거닐던 길을 걷는 장면으로 이어질 뿐인데요. 마치 결국 두 사람이 헤어졌음을 암시하는 듯하죠.

헨리는 헬렌이 15년 전 콩쿠르에 탈락한 후 마음의 위안을 얻었던 스위스 질스마리아를 찾아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앞으로 무대에 올라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반전입니다. 헨리가 자신감 넘치는 거장 피아니스트의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오른 것이죠. 수많은 사람이 헨리의 연주를 통해 행복해 한다는 헬렌의 말을 떠올리면서요. 헬렌이 쓴 자신의 인터뷰를 읽는 헨리의 표정은 밝습니다. 그가 처음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던 젊은 날처럼,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향하는 길목에서 다시 한 번 피아니스트로 무대에서 빛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가득한 모습으로요.

헨리 콜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코다를 찾아갈 날이 멀지 않았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힘든 일들이 수없이 반복될 테지만, 결국에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어떤 날들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가져보면서요!

참고 도서 <알고 보면 흥미로운 클래식 잡학사전>(정은주 지음, 해더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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