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에 대한 사유
코로나 팬데믹 시절, 어느 날의 일입니다. 저는 잡지사 편집부 에디터 시절 처음 만나, 이제는 함께 늙어가고 있는 제 선배, 추명희 작가와 함께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만 담은 책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나눴습니다. 예술가에 대해 클릭 한 번이면 알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책의 쓸모에 대해 고민했고요. 당시 저희는 꽤 진지했습니다. 저는 제 분야인 서양 음악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추명희 작가는 그의 전문 분야인 서양 미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만을 소개한다면, 꽤 근사하고 독보적이고 또 사랑스러운 책이 될 것이다, 결국 서양 예술에 관심 있는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지도 모를 것이다! 라며 기뻐했었지요. 영화 <웡카> 속 명언 "모든 좋은 일은 누군가의 꿈에서 출발한다!"는 말처럼, 이렇게 저희의 수다는 한 권의 책, <아주 사적인 예술>로 탄생했습니다.
종종 주변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보통 책을 구상하며 한 번(혹은 두어 번 그 이상도!)쯤 누구나 이런 부푼 꿈을 꾼 경험이 있더라고요. 가령 이 책은 앞으로 대단한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 혹은 BTS나 대통령의 추천 도서가 되어 수많은 독자들의 품으로 갈 것이다 등등요. 물론 저와 추명희 작가가 그린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현재 절판(판매 중지) 중이라, 앞으로 영영 이 책을 다시 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 이 책을 떠올리며 설레하던 그때는 절대로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지요. 이런 것이 예측불가한 세상살이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네요.
여튼 <아주 사적인 예술>을 작업하면서 저와 추 작가는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술가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많이 느꼈고요. 비발디부터 모차르트, 베토벤과 쇼팽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사랑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저희의 사랑에 대해서도 사유하게 되었고요. 대체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감정, 사랑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대해서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 사랑! 사랑!
차이콥스키의 아내, 그게 내 운명이에요

얼마 전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개봉했습니다. 예술 영화 애호가인 제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제목에 끌려 영화를 봤고요. <아주 사적인 예술>을 집필할 때도 차이콥스키의 사랑에 대해 의문을 참 많이 가졌던 터라, 더욱 더 궁금했던 작품이거든요. '스포일러는 범죄'라는 농담이 있지만, 이번 칼럼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영화를 보실 독자들은 영화를 본 이후에 다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은 분들이 아는 선율을 소개해드리자면요. 해마다 12월이 돌아오면 지구촌을 장식하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음악입니다. '딴 따라라 딴 딴 딴 딴 따안~' 이 밖에도 러시아 음악만의 특징들을 매우 서정적으로 때로는 격정적으로 다양한 작품들에 투영한 작곡가입니다. 참 그는 보통의 음악가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음악 경력을 쌓은 분은 아닙니다. 불안정한 음악가라는 직업 대신, 안정적인 직업을 원했던 그의 부모 의견에 의해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도 차이콥스키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요. 법률학교 졸업과 동시에 당시 러시아 제국 법무성에 취업해 1등 서기관으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이 시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서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갔거든요. 당시 차이콥스키의 나이는 스무살 남짓. 음악을 배우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작곡에 진심인 음악가로 경력을 시작합니다. 특히 그의 교향곡, 협주곡은 러시아를 넘어 유럽에 이르기까지 큰 유명세를 떨쳤고요. 이렇게 그는 러시아의 스타 음악가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아내>(Tchaikovsky’s Wife,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유명 음악가로 활동하던 당시 차이콥스키에게 한 눈에 반한 여성이자 실제로 차이콥스키와 결혼했던 러시아 귀족 가문의 후손 안토니나 밀류코바(배우 일리오나 미하일로바, Antonina Ivanovna Miliukova, 1848~1917)의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제목처럼 차이콥스키가 주인공이 아니라,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주인공입니다. 아내의 시선에서 모든 일들을 바라봅니다. 영화 제작진 측에 따르면, 실제 안토니나 밀류코바가 쓴 편지 등 사실을 중심으로 구성한, 일종의 실화 바탕의 영화입니다. 저도 <아주 사적인 예술> 속 차이콥스키의 사랑을 취재하면서 실제 차이콥스키가 쓴 일기, 편지 등을 살펴본 일이 있는데요. 그가 남긴 편지와 일기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편지와 글이 약 5383편이더라고요. 차이콥스키는 글로 기록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들 중에서 차이콥스키가 안토니나와 결혼하면서 내세운 결혼 조건을 읽으면서 너무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당신의 사랑에 감동했지만,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줘."
차이코프스키가 안토니나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발췌
그런데 영화처럼 차이콥스키는 밀류코바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는 예비 아내에게 결혼 조건을 몇 가지 제안했는데요. 그 내용들이 다소 황당합니다. 우선 결혼 후, 보통의 부부 사이가 아니라 형제 같은 관계를 지켜야 한다고 못 박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을 기피하는 성향에다가 성격도 평범하지 않으며 무척 날카롭고 예민하니 그러한 면면을 잘 파악해달라는 조건도 걸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콥스키에 대한 오랜 사랑으로 밀류코바는 모든 것을 따르겠노라 약속합니다. 저라면 이 결혼 안 했을 겁니다.

이렇게 1877년 6월 6일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신랑과 신부의 증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들은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새신랑 차이콥스키는 7월 27일 집에서 나와 여동생이 살던 카멘카로 떠났어요. 약 두 달 후인 9월 12일에야 다시 집에 돌아왔는데요. 그마저도 2주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그들은 이혼했습니다. 결혼 후 그의 아내가 약속을 어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차이콥스키의 강력한 이혼 사유였어요. 부부 관계, 집안일, 다툼 등 결혼 이전의 약속을 모조리 지키지 않았다고요. 아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강에 뛰어들어 삶을 마치고 싶을 정도로 충동을 자주 느꼈다고도 해요. 이후 그는 평생 그 어떤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았고요. 밀류코바를 위해 서류상으로는 부부 관계를 유지하면서, 20년 간 안토니나는 정신 병원에 갇혀 살아야했습니다. 영화에서도 긴장감있게 나오는 장면인데요. 유명 음악가였던 차이콥스키가 안토니나에게 연금을 보내주는 일은 어떤 책임감에서 계속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차이콥스키의 결혼은 그 당시에도 지극히 비정상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의 아내로 살아가는 일이 운명이라 여긴 안토니나의 광기어린 사랑을 지켜보는 마음도 굉장히 불편하고 아렸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 그것을 사랑이라는 공간에 담았다면 그것은 차이콥스키와 차이콥스키의 아내, 안토니나의 모습이 아니었겠지요.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이러한 사실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사람에 대한 한 사람의 광기어린 사랑이 어떻게 치닫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잘못한 사랑은 없다

사실 차이콥스키는 남성을 사랑했다는 마음을 여러 편지, 일기를 통해 고백한 바 있습니다. 1877년 1월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동생이자 모든 속마음을 여실히 털어놓았던 모데스트 차이콥스키에게 새로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알렸는데요. 당시 그가 썼던 편지 내용은 지금까지도 잘 전해지고 있거든요. 그가 얼마나 이 사랑에 설레어하는지 누구라도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간절한 마음이 담겼고요. 차이콥스키는 음악뿐만 아니라 글쓰기에도 큰 재주가 있었거든요. 어쩜 읽는 사람의 마음을 그리도 잘 끌어당기든 지요. 그는 동생에게 '남자 친구가 있는 남자 제자를 사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를 조금씩 사랑하고 있었어. 내 사랑을 그에게 고백해볼까도 싶어. 하지만 내가 나의 감정을 숨기느라 얼마나 멍청하게 굴고 있는지 넌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차이콥스키가 동생 모데스트에게 쓴 편지 중 일부 발췌
이제 슬슬 감이 오시겠지요? 차이콥스키의 결혼에 대한 서사가요.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차이콥스키가 안토니나의 재정적인 후원을 염두에 둔 가짜 결혼을 하려했던 것은 아닐까에 대한 질문을 해볼 수 밖에요. 이제 세상을 떠난 차이콥스키, 안토니나를 찾아가 묻고 싶은 심정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재미 중 하나가 영영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그저 우리의 마음, 기억 속에 차이콥스키와 그를 사랑했던 한 여인의 불행했던 삶을 담아볼 수 밖에요. 그리고 나아가 우리 곁의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면 가장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 끝으로 실제 차이콥스키의 후손을 만난 작가가 쓴 걸작 <차이콥스키>(정준호 지음, 아르테 펴냄)을 소개해드립니다. 차이콥스키에 대한 작가의 깊이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책을 덮은 후 저도 이런 책을 언젠가 써보고 싶다는 다짐을 했던 기억도 살짝 떠오릅니다. 여튼 차이콥스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독자들이라면 이 책부터 읽어보시길 강력하게!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며 이번 칼럼을 마칩니다. 그리고 내 곁의 사랑, 사랑하고 싶은 그 사람을 떠올려보는 시간이 독자 여러분들을 찾아가길 바라봅니다!
"데니스는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후손의 사견이다. 나는 그가 든 근거를 일일이 반박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중략). 소련 시절은 물론이고 현재 러시아에서도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지 않다."
<차이콥스키>(정준호 지음) 중 일부 발췌
참고 도서 <아주 사적인 예술>(추명희, 정은주 지음)
- 클래식 음악을 글로 들어보는 시간! [정은주의 클래식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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