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들의 전통 멜로디에서 나는 위대하고 고귀한 음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음악은 부드럽고 열정적이며 우울하고 엄숙하며 종교적이며 대담하고 명랑합니다."

- 1893년 5월 21일 자 〈뉴욕 헤럴드〉 드보르자크의 인터뷰 중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Leopold Dvořák, 1841~1904). 사진 = 위키피디아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Leopold Dvořák, 1841~1904). 사진 = 위키피디아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에 대한 입장은 분명 사람마다 다릅니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서겠죠. 독자 여러분은 어떤 쪽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과정은 힘들었지만 결과가 좋았으니 되었다, 원하는 결과는 아니지만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 많았으니 괜찮다, 글쎄요. 저는 그래도 결과가 좋은 편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과정이 좋았으니까, 이번 일로 배운 점이 더 많았으니까 하는 말들로 언젠가의 만족할 만한 결과를 그려보는 일에 조바심이 난달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대기 만성형이라 부를 수 있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숱한 날들의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하는 결과에 도착한 분들이기도 하니까요. 서양 음악가들 중에는 대표적인 대기 만성형 인물로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Leopold Dvořák, 1841~1904)가 있습니다.

드보르자크를 대기 만성형이라 부르는 까닭은 그의 이름이 알려지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때가 삼십대 중반이기 때문인데요.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그 나이가 대기 만성형이라 볼 수 없지만, 그 시절에는 꽤 늦게 빛을 발한 경우에요. 만약 드보르자크가 먼 훗날의 멋진 결과를 위해 매일의 과정들을 묵묵히 수행하지 않았다면, 아마 드보르자크의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요?

체코를 넘어 세계로

미국 드보르작 가족. 사진 = 드보르작 미국 유산 협회
미국 드보르작 가족. 사진 = 드보르작 미국 유산 협회

드보르자크는 체코 프라하 근교 넬라호제베스에서 정육점과 여인숙을 운영하던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드보르자크가 전문 도축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지만, 사실이 아니고요. 그는 어린 시절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키웠는데요, 친척들의 도움으로 프라하로 유학을 떠나 음악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집세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형편 속에 지냈거든요. 하지만 그는 음악 공부에 대한 과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프라하 국립 극장 최초의 오케스트라에 입단해 비올리스트로 일한 적도 있고,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안정적인 수입을 벌지 못했어요. 음악 교사 등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하며 지냈는데요. 바쁜 일상 중에서도 작곡에 대한 열정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요.

성실한 드보르자크의 노력 덕분일까요. 드디어 그는 프라하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음악가로 어떤 성공이나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을겁니다. 드보르자크는 체코를 넘어 유럽 대륙에서 활동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기회를 찾던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운영하던 일종의 장학금 지원 제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문 음악가로 활동하고 싶어 하는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돕는 제도를 운영 중이었는데요. 이 장학 제도는 오늘날의 국제 콩쿠르와 비슷한 창구였습니다.

장학생이 되고 싶은 음악 학도들은 오디션에 참가해 자신의 재능을 선보였고요. 심사를 거쳐 장학 제도 오디션에 합격하면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음악가로 이름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또 만약 그가 합스부르크 제국 장학생에 선발된다면, 당시 수입의 서너 배나 많은 돈을 무려 5년간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동력을 발판삼아 그는 장학생 선발 오디션에 교향곡 두어 편과 실내악 작품을 보냈습니다. 다행히 드보르자크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당대 최고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던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가 그의 음악성을 알아본 덕분이었습니다.

이후 브람스는 드보르자크를 자신보다 더 유명한 음악가로 성장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브람스와 드보르자크는 나이 차이가 10살도 채 안 나는 사이였지만, 드보르자크가 아직 새파란 신인인 데 비해 브람스는 이미 저명한 음악가 반열에 올라 있었거든요.

우선 브람스는 드보르자크가 작곡한 여러 작품을 베를린의 짐로크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이 출판사는 모차르트, 베토벤 등 당대 최고 클래식 스타들의 작품을 출판했던 곳인데요.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고, 또 큰 규모의 출판사였습니다. 브람스가 첫 번째로 출판사에 소개한 드보르자크의 작품은 〈모라비아 2중창 곡집〉인데요. 이 악보집은 브람스의 예상대로 뜨거운 반응을 받았습니다.

브람스의 조언을 받아 무명 작곡가의 작품을 출판한 출판사는 좋은 투자처를 찾아 기뻤겠지요! 드보르자크의 첫 작품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자, 출판사 측은 즉시 드보르자크에게 다음 출판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당시 드보르자크의 인기를 상상해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슬라브 무곡〉인데요. 이 작품을 통해 드보르자크는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빈과 뉴욕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프라하로 돌아왔고요.

프라하에 위치한 드보르작 박물관. 사진 = 드보르작 프라하 협회
프라하에 위치한 드보르작 박물관. 사진 = 드보르작 프라하 협회

끝으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드보르자크에 대한 미담이 있습니다. 그가 미국 국립 콘서바토리의 음악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유색 인종의 무료 입학을 강행한 일인데요. 당시 이 사건은 미국과 유럽 음악계에서 상당한 화제를 모았거든요. 드보르자크는 "피부색은 음악을 배우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지요.

1893년 5월 21일 자 〈뉴욕 헤럴드>와 인터뷰 중 "흑인들의 전통 멜로디에서 나는 위대하고 고귀한 음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음악은 부드럽고 열정적이며 우울하고 엄숙하며 종교적이며 대담하고 명랑합니다"라고 말했는데요.

실제로 그가 재임하던 시절 20세기 초의 미국은 짐 크로법 등 영향으로 흑인에 대한 합법적인 차별이 성행하던 시기였는데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이 얼마나 많은 흑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그의 묘비에는 흑인들의 특별한 눈물이 드보르자크를 추모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가 피부색이 다른 음악학도들에게 각별하게 존경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체코의 국민 음악가로 불리는 그의 장례식은 체코 국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이렇게 드보르자크는 체코의 국민 음악가이자 흑인 음악가들의 아버지로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어려운 현실이라는 매일의 과정 속에서 언젠가의 따듯한 결과를 위해 살아갔던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 여러분께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힘이 되신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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