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안전상비의약품' 품목이 도입 13년째 그대로다. 약국이 문을 닫는 명절·심야 시간대 약을 구하지 못하는 불편이 반복되면서 품목을 현실에 맞게 손봐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이 가운데 국회가 오는 28일 품목 확대를 논의하는 정책 토론회를 열기로 예고해 제도 개선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2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현재 안전상비약으로 지정된 품목은 해열진통제·감기약·소화제·파스 등 4개 효능군 13종이다. 이 중 '어린이용 타이레놀정 80mg'과 '타이레놀정 160mg'은 생산이 중단돼 실제 편의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은 11개다.
제도 설계 당시 보건복지부는 최대 20개 품목까지 지정할 수 있도록 했지만, 도입 이후 한 차례의 조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품목 재검토를 위해 마련된 '안전상비약 지정심의위원회'는 2018년 이후 열리지 않았다.
반면 소비자 이용 패턴은 달라졌다. 안전상비약 시민네트워크가 올해 8월 전국 1087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 따르면 편의점 상비약 구매 경험은 83.8%로 2023년 대비 12.3%p 늘었다.
구매 이유로는 '약국이 문을 닫은 공휴일·심야시간 등 긴급 상황에서 필요해서'가 68.8%로 가장 많았다. 응답자 10명 중 9명은 편의점 안전상비약 구매가 긴급 상황이나 일상적 약 수요 충족에 실질적 도움이 됐다고 답했다.
품목 확대 필요성을 향한 공감대도 커지고 있다. 같은 조사에서 상비약 품목을 더 늘려야 한다는 응답은 2023년 62.1%에서 올해 85.4%로 증가했다. 생산이 중단된 2개 품목의 대체 필요성까지 포함하면 전체 응답자의 94.7%가 '확대 또는 교체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소비자 수요 증가는 실제 매출에서도 확인된다. 한국편의점산업협회에 따르면 안전상비약 매출은 2018년 504억원에서 2023년 832억원으로 5년 새 65% 늘었다. 올해는 독감 유행이 예년보다 빨라지면서 10~11월 안전상비약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두 자릿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이 늘자 일각에서는 편의점업계가 수익을 위해 품목 확대를 요구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편의점 업계 관계자는 "상비약 판매가 편의점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도 되지 않는 미미한 수준"이라며 "수익보다는 긴급 상황에서 약이 필요한 소비자를 돕는 역할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부 제품이 단종되면서 상비약 품목 수가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이라며 "소비자 요구가 있는 만큼 안전성이 확인된 품목을 단계적으로 늘려가는 방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규제 준수율 5% 미만…"관리 부실한데 품목만 늘려"

약사단체가 품목 확대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전성 우려로 꼽힌다. 안전상비의약품 약국외 판매제도에 따르면 안전상비약을 판매하는 편의점은 한 번에 하나의 포장 단위만 판매할 수 있다. 중복 구매를 제한해 오남용을 방지하겠다는 취지다. 또 일반 상품과 혼동되지 않도록 안전상비약 진열대를 별도로 설치하고 소비자가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진열해야 한다.
다만 이런 규정들이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래소비자행동이 올해 7월 전국 안전상비약 판매업소 1033곳을 방문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97.2%인 1004곳이 판매 준수사항을 1건 이상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오남용 방지를 위한 '1회 1개 포장단위 판매' 규정을 지키지 않은 곳도 56.1%로 집계됐다.
인천시약사회는 최근 발표한 입장문에서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며 "규제 준수율이 5% 미만에 불과한 시스템에서 품목을 확대하는 것은 국민 건강의 위험을 정부가 방관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약사단체는 전문가의 복약지도가 가능한 공공심야약국이야말로 접근성과 안전성을 모두 확보할 수 있는 제도라는 입장이다. 정부는 2022년부터 심야·휴일 시간대 운영하는 약국을 지원하는 공공심야약국 사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올해 8월 기준 전국 220곳에서 운영 중이다.
다만 공공심야약국의 수가 편의점 수에 비해 충분하지 않고, 농어촌 등 '무약촌' 지역에서는 약국·24시간 편의점 모두 부족해 접근성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약사 A씨는 "약사들은 의약품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공공심야약국을 대안으로 제시해왔다"며 "품목 확대를 논의하기 전에 공공심야약국 지원 사업을 확대하는 등 전문가 복약지도가 가능한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약사 B씨는 "의약품은 편의성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편의점에서는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약을 구입하고 부작용 설명도 받기 어렵다"며 "심리적 저항감이 낮아 과복용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