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은 사람은 이미 다 짝이 있다'는 말, 한 번쯤 들어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또 두 번쯤은 우연히 만난 이성에게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가 결혼했거나 교제 중인 상대가 있음을 알고 쓸쓸히 돌아선 적도 있을 거고요.
그러나 다시 마음을 바꾸고, 용기를 내어 포기했던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것이 사랑의 역사이기도 하니까요.
시대에 따라 사랑의 쟁취에 대한 시선은 분명 다릅니다. 특히 19세기 파리에서는 약혼녀 있는 남자를 가로챈 여자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는데요. 그 파렴치한 여자가 자신을 믿고 약혼녀를 버린 남자를 배신하고, 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리지앵들은 곧 그 여자의 매력에 폭 빠졌습니다. 그에 대한 신비한 소문은 유럽 여러 도시로 퍼졌고요. 지금까지도 지구촌 곳곳에서 <카르멘>이라는 이름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인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 그의 오페라 <카르멘>은 시나리오 때문에 거센 비판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물론 비제의 신선했던 또는 실험적이었던 작곡 스타일에도 비수가 쏟아졌지만요. 비제가 프랑스의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유명 소설인 『카르멘』을 오페라 대본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 직후부터 초연 이후까지 한동안 이 오페라에 대한 볼멘소리가 이어졌습니다.
때문에 극장 측과 대본 작가 등 관계자들의 회의를 통해, 원작에 없던 캐릭터를 등장시켰고요. 심지어 원작의 내용을 일부 수정했어요. 차라리 카르멘이 빼앗은 남자 돈 호세와 잘 살면 초연 후 관객의 저항과 비판은 덜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돈 호세를 속이고, 또 다른 남자 에스카밀리오와 사랑에 빠진 카르멘은 결국 죽음을 맞습니다. 그 사랑은 비극이었지만, 관객이 원한 결말이기도 했습니다.
불행했던 결혼

안타깝게도 비제는 말도 말고 탈도 많았던 오페라 <카르멘>의 성공을 목격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도 죽기에는 아까운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을 홀로 남겨준 채로요.
비제의 장례식에서 그의 절친이던 샤를 구노는 "6년이라는 결혼의 시간동안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결혼은 나에게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겁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비제의 편지를 낭독했는데요. 이 자리에는 스물 한 살의 비제가 한 때 열렬하게 사랑했던 아내, 제네비브 할레비도 있었습니다.

비제의 스승 쟈크 할레이의 딸이었던 제네비브는 비제와 첫눈에 반했는데요. 1867년 비제가 친구 에드문트 갈라베르트에게 "나는 완벽하게 진지한 사랑에 빠졌어! 내가 사랑할 소녀를 만났어. 하지만 2년을 기다려야 해. 그를 나의 아내로 만들거야. 확신해, 신께서 나에게 보낸 사랑이야."라는 설레는 사랑의 감정을 편지로 보냈을 정도로요.
그러나 그토록 사랑해서 결혼한 그들은 불행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제네비브는 아들 쟈크 비제Jacques Bizet를 낳고, 석 달 만에 집을 나갔거든요. 그리고 제네비브는 매일같이 다른 사랑을 찾아다녔습니다.
비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고 하던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속이 깊은 캐릭터였거든요. 정말 친한 친구에게 조용하게 자신의 근황을 알리면서도 꼭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로요.
그는 자신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파리의 사람들에게 모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집이 너무 좁다는 것과 유모와 그의 13살짜리 아이까지 한 집에 사는 것이 무척 불편하다는 불평을 남겼습니다.
비제만의 카르멘

비제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카르멘의 저주를 받아 단명했다는 루머가 퍼졌는데요. 유독 오페라 작곡에 몰두했던 비제가 그 중에서도 특별하게 애정을 쏟았던 작품이 초연에서 악평을 받았던 것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거라면서요. 밝혀진 사인은 호흡기 질환이지만, 심한 우울증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비제의 지인들도 입을 모았고요.
그러나 비제와 진짜 가까웠던 사람들은 카르멘과 비제의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소문처럼 카르멘 때문에 비제가 고통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제가 카르멘 때문에 삶을 마칠 때까지 잠시나마 행복한 사랑에 빠져있었다는 것을요. 무대 위의 첫 번째 카르멘, 프랑스의 메조소프라노 셀레스틴 갈리 마리에와 비제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오페라 속 카르멘과 돈 호세처럼요.
비제와 셀레스틴이 처음 만난 것은 비제가 <카르멘>을 작곡하기 전입니다. 당시 비제는 서른다섯의 셀레스틴이 보통의 여성과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14년 째 남편을 잃은 채 외롭게 살던 셀레스틴과 결혼 생활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비제는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렸고요.
비제는 셀레스틴에게 받은 영감을 악보로 쉴 새 없이 옮겼습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하죠. 비제는 원치 않았지만, 유명 오페라 작곡가와 그 오페라의 주인공을 맡은 여성 성악가의 염문설은 발 없는 말처럼 오페라 극장을 들썩였습니다. 때문에 비제가 <카르멘>의 초연을 준비하며 최종적으로 선택한 주인공이 다소 의외의 가수라는 뒷말도 많았고요.
그러나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는 불편한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셀레스틴은 비제의 카르멘을 가장 카르멘답게 그려냈습니다. 매혹적인 카르멘의 몸짓이나 표정까지 완벽하게 연구했던 그의 퍼포먼스 덕분에 카르멘은 천천히 입소문을 탔고요. 비제가 심혈을 기울였던 <카르멘>을 오늘날의 성공작으로 만든 것도 셀레스틴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를 정도로요.
셀레스틴은 1874년 3월 3일 첫 카르멘을 선보였고요. 이후 10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에서 카르멘 역을 맡아 노래했습니다. 비제는 죽기 전까지 초연부터 석 달간 무려 22번이나 셀레스틴의 공연에 갔고요. 셀레스틴은 완벽한 집시 여인을 소화하며, 오페라 퍼포먼스의 첫 장을 열었습니다. 셀레스틴이 비제와의 숨겨온 사랑 덕분에 카르멘으로 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은 그런 힘을 종종 발휘하곤 하니까요. 사랑에서 오는 자신감과 같은 마음이요.
참 셀레스틴은 비제가 죽기 전 날 무대에서 실신했는데요. 울부짖고 괴로워하면서요. 1874년 6월 2일 33회 차 카르멘 공연 도중 3막을 시작하려던 중의 일이에요. 그런데 그 다음 날 갑자기 비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진실로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기에, 셀레스틴이 비제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요. 무려 4천 명이 모였던 비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셀레스틴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카르멘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계약했던 카르멘의 첫 시즌을 마쳤어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비제를 그리워하면서요.
참고 도서 <아주 사적인 예술>(추명희, 정은주 공저, 42미디어콘텐츠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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