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크의 후손, 파리의 스타 음악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프랑스의 시골 마을 시부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지역은 바스크의 땅입니다.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령의 북부 바스크 지방과 프랑스령의 남부 바스크 지방에 걸쳐져 있는 일곱 지역을 합해 부르는 지역인데요. 바스크 지역은 현재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땅을 흔히 부르는 말이고요. 따라서 프랑스어로 말해도 되고 바스크어로 말해도 되는 곳입니다. 이를테면 캐나다의 퀘벡 같은 곳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또 현대의 국경이 정해지기까지 수많은 세월동안 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바스크 민족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고요. 바스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민족 중 하나인데요. 오늘의 주인공 모리스 라벨도 그들의 후손입니다.
라벨의 아버지는 스위스 사람이고 어머니는 바스크계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난 지 석 달 후에 부모님을 따라 파리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사실 파리지앵으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시부르는 이 위대한 작곡가의 고향임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합니다. 지금도 시부르에는 라벨 생가가 잘 보전되어 있고 라벨의 이름을 딴 공원과 거리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파리로 이사 간 덕분일까요? 그는 14세에 뛰어난 음악 실력을 인정받고 파리 국립 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유명한 음악가였던 가브리엘 포레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그는 특히 피아노와 작곡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는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등을 이 시기에 작곡했습니다.
당시 파리 국립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우던 학생들은 로마 대상을 타고 싶어 했습니다. 물론 라벨도 마찬가지였어요. 오늘날로 치면 올림픽 금메달, 야구로 치면 그랜드 슬램이랄까요. 그러나 부정 심사 사건에 휘말려 라벨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로마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고 그는 음악원을 떠났습니다. 그때든 지금이든 있을 법한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라벨, 당신의 음악은 지금 더 인기 있으니 괜찮아요! 당신 대신 상을 탔던 분은 지금 이름조차 모르겠는걸요.
드뷔시를 존경하다

1900년부터 라벨은 젊은 예술가, 시인, 비평가, 음악가들과 함께 공식적인 모임을 가졌습니다. 자신들을 예술적 소외자라 부르며, 다양한 예술에의 방법을 모색했는데요. 이들은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 모임에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마누엘 데 파야 등도 참석했는데요. 이들은 하나같이 당대 최고의 음악가이던 드뷔시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라벨도 마찬가지였고요.
당시 그들은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드뷔시를 꼽았습니다. 라벨은 "드뷔시는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도 프랑스 전통과 어울리는 고유의 규칙을 만들었다"며 드뷔시의 음악을 극찬하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라벨 자신은 드뷔시의 상징과 반대의 길을 걷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10년 간 음악적 친구로 잘 지내던 드뷔시와 라벨의 인연은 결국 파국을 맞았는데요. 누가 누구에게 예술적 영향을 더 끼쳤는지에 대한 뒷이야기들이 시작이었다는군요!
샴고양이 집사로 충성하다

라벨은 늘 사랑에 빠져 지냈으나 평생 결혼하지 않은 베토벤처럼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성과 남성 모두와 연애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파리의 사창가를 자주 드나들었다는 기록과 오랜 연인이었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거든요.
그리고 유난히도 고양이를 사랑했습니다. 여러 고양이 가운데서도 샴고양이만을 길렀다고 해요. 고양이들을 몹시 아낀 그는 고양이의 말을 이해하고 할 줄도 알았다고도 합니다. 누군가의 거짓말이겠지만요. 라벨은 고양이 울음소리의 높낮이를 일정 신호로 나누고 그 의미를 찾았다고 합니다.
1916년에 그는 프랑스의 작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에게 동화를 주제로 한 오페라의 음악을 청탁받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어린이를 좋아했던 라벨은 흔쾌히 승낙했어요. 그러나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어서 작업은 점점 미궁으로 빠졌습니다.
만날 사람들은 결국 만나는 법이죠. 그 후로 9년이 지난 1925년 3월 21일에 콜레트의 대본과 라벨의 음악이 한 무대에 오릅니다.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극장에서 판타지 오페라 <어린이와 마법>이 처음 세상에 공개됩니다. 총 공연 시간은 40~50분 정도입니다. 보통 짧게는 두 시간부터 길게는 여섯 시간까지도 걸리는 기존 오페라에 비해 무척 길이가 짧은 편입니다. 그러나 자주 무대에 오르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판타지 동화의 캐릭터를 구현하는 과정 때문에 공연 시간에 비해 제작비가 많이 든다고 해요.
이 오페라는 공부하기 싫어 말썽을 부리던 아이가 온갖 사물과 동물, 식물들로부터 공격 아닌 공격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의자, 괘종시계, 주전자, 나무, 잠자리, 박쥐, 개구리 등 아이를 둘러싼 모든 물건과 생명체들이 아이의 잘못을 추궁합니다. 궁지에 몰린 아이는 다람쥐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실신하고 마는데 동물들은 그 사실을 알고 아이를 엄마에게 데려다주기로 하죠. 간단히 요약하면 모두에게 혼이 나기에 마땅한 꼬마가 다람쥐의 상처를 치료해 준 덕분에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오페라의 인기 아리아인 '야옹 듀엣'은 고양이를 사랑하는 라벨의 마음이 듬뿍 담긴 노래입니다. 1막의 마지막 즈음에 검은 수고양이와 하얀 암고양이가 등장하여 함께 부르는 이중창입니다. 한번 이 아리아를 들어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실제로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 같거든요! 샴고양이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라벨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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