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기 가을이 되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무더웠던 여름 폭염이 지나가 후련한 마음인데요. 내년 여름은 내년에 생각하기로 하고요, 언제나 짧기만 한 우리의 가을을 마음껏 즐기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독서, 음악, 등산, 여행 등 가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여러 키워드 중에 사랑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싱글이시라면 새로운 분을 만나 예쁜 사랑을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테고요. 그런데 그것이 또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언젠가의 사랑을 기다리면서 감상해보실 수 있는 오페라 한 편을 소개해드리려고 해요.
물론 이 오페라의 사랑은 해피엔딩입니다. 여러 역경을 이겨내고 사랑을 지킨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소개합니다. 이 오페라에는 바람피우고 속고 속이는 그런 사랑 이야기는 일체 없고요. 서로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완벽한 사랑으로 맺어집니다.
제가 가진 사랑에 대한 선입견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행복한 사랑의 결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우리들이 살며 마주하는 모든 사랑이 그렇지 못하기에 더 더욱, 이런 사랑 이야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비극을 뒤엎은 부부의 해피엔딩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독일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의 대표 작품입니다. 그는 고전주의 시대의 주요 음악가 중 한 명으로, 빈 궁정악장을 지냈는데요. 청년기에 이탈리아 오페라에 매료된 후, 이탈리아어로 쓴 오페라 <아르타세르세>를 작곡했습니다.
이후 그의 오페라는 밀라노, 베네치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요. 특히 그는 오페라의 불필요한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해, 오페라 개혁자로도 평가받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는 오르페오인데요. 태양, 음악, 궁술 등의 신 아폴로의 아들인 그는 현악기의 일종인 리라 연주에 탁월했습니다. 그의 음악을 듣는 자는 누구나 감동에 빠졌거든요.
글루크가 1762년 작곡한 이 오페라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모티프로 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와 이 오페라의 큰 차이점은 결말인데요. 원작은 비극이지만 글루크는 해피엔딩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대중이 열광하던 오페라의 결말에 맞게 각색한 것이지요. 관객의 취향을 고려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신비한 음악의 재능을 가진 오르페오는 그동안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오페라, 발레, 교향시 등의 작품으로 태어났는데요. 최초의 오페라로 기록된 쟈코포 페리의 오페라 <에우리디체>(1600년)를 비롯해, 몬테베르디 <오르페오>(1607년), 베를리오즈 <오르페>(1827년) 등이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이야기를 다룬 음악 작품입니다.
오페라의 역사를 바꾼 첫 작품
18세기 초기의 유럽에서 유행하던 바로크 오페라는 필요 이상으로 화려했습니다. 가수의 기교와 과장이 매우 지나쳤고, 음악을 괴물처럼 만들었다는 비판이 쇄도했거든요. 글루크는 "단순한 기법을 써야 한다"고 확신했는데요. 과감하게 오페라의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그동안의 오페라 속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했어요. 강단 있는 작곡가 글루크의 첫 개혁 작품이 바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입니다.
총 3막(약 2시간)으로 구성된 이 오페라는 '얼마나 맑은 하늘인가',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나', '슬픔의 노래' 등의 아리아가 유명합니다. 그 중 3막 1장에 등장하는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나'는 가장 사랑받는 아리아인데요. 1762년 빈 초연 당시 오르페오 역은 카스트라토가 노래했습니다.
20세기 초 마지막 카스트라토가 공식 연주를 중단한 후, 몇 차례 개정판에 따라 카운터테너, 여성 알토 등이 오르페오를 맡고 있습니다. 에우리디체, 아모레, 사랑의 신은 모두 소프라노가 노래합니다.
그대 없이 무얼 하리오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솔깃한 제안에서 시작합니다. 아내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던 오르페오는 사랑의 신에게 귀가 번쩍 뜨일만한 제안을 받는데요. 지하 세계의 왕 플루토의 마음을 음악으로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의 아내를 살려주겠다는 것이었어요.
단 절대로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아내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지켜야 하고요.
음악의 신 아폴로의 아들답게 오르페오는 모든 과정을 통과했는데요. 그러나 자신의 변심을 의심하는 아내를 달래주기 위해 규칙을 어기고, 아내는 두 번째 죽음을 맞고야 맙니다.
이에 비관해 자살하려는 오르페오를 가엾이 여긴 사랑의 신은 그의 아내를 다시 살려주고요. 기쁨에 벅찬 부부는 사랑의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는 내용입니다. 비극이 아닌 결말 때문일까요. 원작보다 이 오페라를 가득 채운 사랑 이야기가 더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특히 이 오페라 3막 1장의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나'는 오페라의 이야기 중 가장 절망적인 부분으로 손꼽는데요. 자신의 실수로 아내가 다시 죽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는 오르페오의 절규가 배어나거든요.
그러나 이 아리아의 음악은 솔직히 슬프지 않습니다. 오르페오의 노랫말과 달리 기악 반주의 분위기는 역설적이게도 밝은 느낌마저 주고요. 원작의 결말이 아닌 해피엔딩을 염두에 둔 설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비통한 노랫말은 부드럽고 따듯한 기악 반주와 함께 흐르고요.
오르페오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오페라 속 대사를 일부 소개합니다. 혹시라도 지금 힘든 사랑을 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오르페오의 노래를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3막 1장 중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나'
오르페오의 가사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나?
사랑하는 그대 없이 장차 나는 어찌할 것인가?
에우리디체! 오 하느님 대답해주세요!
나는 그대의 충실한 사랑,
이제 내게는 하늘도 땅도 누구 하나 도와줄 이도 희망도 없소.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나?
사랑하는 그대 없이 이제 나는 어찌할 것인가?
부디 내 목숨과 함께
이 고통을 단호히 끊어 다오!
나는 이미 캄캄한
지옥의 동굴로 돌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그대와 나를 갈라 놓은 길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리운 내 우상의 그림자여,
기다려다오, 부디 기다려 다오!
그대는 이 남편을 떼어 놓고
지옥의 강 레테를 떠나지는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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