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사랑의 결론들

살다보면 가끔 혹은 종종 친구나 가까운 분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드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성격에 따라 미주알고주알 연애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들려주는 친구도 있었지만, 아무 말 없어도 표정이나 분위기로 그의 연애 상황이 좋지 않음을 보여주는 분들도 있었고요. 만날 때마다 새 연인을 소개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수 년간 한 사람만을 만나던 친구도 떠오르고요. 사랑만큼 개인적인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저를 돌아보자면, 네, 미주알고주알 유형이었지요. 제 사랑 고민을 들어주셨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종종 주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주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랑의 결론을 만나기도 합니다. 특히 그 아름답고 서러웠던 여러 사랑의 결론 중에서요. 누군가 오래 만난 연인과 이별한 후에 새로운 사랑을 만나 결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만약 이별 후 새로운 사랑을 만난 분이 제 친한 친구라면,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겠지요. "그래 잘 되었다. 새로운 분이 진짜 네 짝이다!"하면서요. 하지만 반대로 이별당한 대상이 친한 친구라면, 이 경우는 다소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했지요. 이별하자마자 결혼한 친구의 전 연인을(직접 찾아가서 욕이라도 퍼부어 줄 기세로!) 아주 편파적인 재판을 여는 것은 기본이고요. "정말 그 놈이랑 잘 헤어졌어!", "곧 더 좋은 분을 만나게 될 거야!"라는 말로 아픈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고요.

이렇게 이별하자마자 바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경우를 두고 '환승' 연애라는 표현을 쓰지요. 글쎄요. 그런데 그냥 저는 결국 사랑과 결혼은 노력이 아니라 운명이라 믿는 사람이여서요. 환승이 아니라 갈 곳에 도착했다, 잘 도착했다, 그런 표현이 더 이치에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별은 사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냥 서로가 걸어가는 길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될 일이거든요? 태어나 죽고, 만났다 헤어지는 것처럼요. 하지만 우리들 마음도 마음인지라, 머릿속의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모든 상황을 헤쳐 나갈 수도 없는 것도 맞고요. 운명을 만나기까지는 이런 저런 폭풍우를 뚫고 지나가야하는 것! 그렇게 믿고 가보는 것도 괜찮은 이별 후 대처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1858년 독일의 괴팅겐과 데트몰트에서도 결혼을 망설이다 결국 안 좋게 헤어졌던 한 쌍의 연인이 있었습니다. 쿨하게 서로 이별을 받아들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불행하게도 한쪽은 50년이 지난 후에도 젊은 날의 이별에 대해 마음 아파했어요. 이별을 통보받은 쪽은 “그때 그 놈은 나쁜 놈이었지!” 하는 내용이 주축인 회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무려 반세기 동안 헤어짐의 뒤끝이 있었던 그 주인공들을 소개합니다.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

브람스의 첫사랑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평생 스승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을 사랑했습니다. 덕분에 슈만과 클라라, 브람스의 사랑 이야기는 서양 음악사의 삼각관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스캔들로 남았고요. 하지만 소위 막장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클라라와 브람스는 어떠한 불륜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브람스도 클라라도 도덕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한시도 놓은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부 알 수 없으니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요.

클라라 슈만(Clara Josephine Schumann, 1819 ~ 1896). 
클라라 슈만(Clara Josephine Schumann, 1819 ~ 1896). 

클라라는 남편 슈만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브람스의 마음을 모른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남편 슈만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브람스와 남녀 이상의 감정으로 만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마음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챌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적어도 브람스의 사랑이 진짜였기 때문이겠지요. 클라라와 브람스의 마음에 대해 글을 쓰고 있으니, 저 또한 마음 한구석이 시려오는 듯합니다. 만약 클라라가 슈만보다 먼저 브람스를 만났다면 그 둘은 진실한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어쨌거나 슈만과 클라라를 바라보며 브람스는 외로웠을 겁니다.

그러나 브람스도 자신만을 바라보는 여인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여인과 행복한 사랑을 나누었는데요. 그의 새로운 뮤즈는 1859년 독일 괴팅겐의 한 모임에서 만났던 두 살 아래의 아가테 폰 지볼트(Agathe von Siebold, 1835~1909)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첫눈에 반했습니다. 아마 브람스는 아가테를 만난 후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음에 무척 기뻤을 것 같아요. 늘 클라라에 대한 마음을 가슴 속에 품고만 살았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사랑은 표현할 때 비로소 사랑이 되는 법이니까요.

당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음악가 브람스가 첫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은 독일 전역에 삽시간에 퍼졌고요. 재미있는 사실은 브람스는 자신의 연애에 사람들이 이토록 큰 관심을 가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브람스는 아가테와 비밀 연애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온 동네방네 사람들이 자신의 연애사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고 해요. 어찌되었든 간에 그들은 사랑에 폭 빠져 지냈습니다.

브람스의 첫사랑 아가테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브람스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단꿈을 꾸었을 거예요. 그들이 연애하던 무렵 브람스는 데트몰트의 궁정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궁정 음악가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모두 바라던 직장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공기관이라고 설명하면 좋을 듯해요. 당시의 음악가들은 불안정한 수입에 대한 걱정 없이 월급을 받는 궁정 음악가로 살고 싶어 했는데요. 물론 궁정의 주인 취향에 맞는 음악 활동을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할 때도 있었겠지만요. 어느 하늘 아래든 샐러리맨의 설움은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구속의 반지는 돌려드리리

아가테 폰 지볼트(Agathe von Siebold, 1835~1909).
아가테 폰 지볼트(Agathe von Siebold, 1835~1909).

브람스와 아가테는 이보다 더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둘은 누가 보아도 완벽한 연인이었을 거예요. 달콤했던 어느 날 아가테와 브람스는 서로에게 반지를 선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반지를 소중하게 끼고 다녔습니다. 반지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의 약속이죠? 그러나 브람스는 아가테와 반지까지 나누어 끼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세상 모든 연인들이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과제죠. 바로 결혼인데요. 브람스와 아가테도 자신들의 사랑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는데요. 유명 음악가와 아름다운 아가씨의 연애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결말에 결혼을 바라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브람스는 사랑의 완성이라 부를 수도 있는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돌연 태도를 바꾸었어요. 브람스는 확실하게 결혼 생각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가테와 황홀한 시간에 푹 빠져 지냈지만,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의 역할은 맡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고요. 혹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둔 클라라를 잊지 못해 차마 아가테와 결혼할 수 없었을지도요.

세상 그 누가 당시 브람스의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한 가지 그의 마음을 추리해볼 수 있는 편지가 전해지는데요. 브람스가 아가테와의 결혼 이야기가 나온 후, 아가테에게 직접 보낸 황당할 정도로 무책임한 연서입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하지만 속박당할 수는 없군요. 나한테 편지를 써요. 내가 당신에게 돌아가서 당신을 안고 입 맞추며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지 말이오."

참 애매한 표현 아닌가요. 결혼하기 싫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대놓고 자신은 구속받기 싫다고 했고요. 또 자신과 아가테의 관계를 지볼트가 결정하도록 책임을 슬쩍 밀어놓은 듯도 하고요. 저는 이런 남자라면 연애든 결혼이든 무조건 반대입니다.

만약 브람스가 아가테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요? 한 가정을 이끌고 아이들을 기르며 살았을 브람스의 음악 세계는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라라를 위한 진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든 결혼이라는 감옥에 들어가기 싫어서였든 브람스는 당시 아가테에게 나쁜 남자로 남았습니다. 사실 브람스를 떠올릴 때 클라라와의 관계로 인해 순정파라는 인식이 많은 편인데요. 아가테와의 이별 일화에서 보자면 다소 애매모호한 남자 혹은 결혼은 싫지만 연애는 계속 하고 싶다는 이기주의적인 면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네요. 참, 브람스가 아가테에게 받았던 반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세월 속에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겠지만, 만약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연인들이 나눈 한때의 사랑을 잘 간직하고 있겠지요.

참고 문헌 <브람스 평전>(이성일 지음, 풍월당 펴냄), <아주 사적인 예술>(추명희, 정은주 지음, 42미디어콘텐츠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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