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드보르자크에게 미국 국립 음악원 교수직을 제안했던 재닛 써버. 사진 = 위키피디아
1881년 드보르자크에게 미국 국립 음악원 교수직을 제안했던 재닛 써버. 사진 = 위키피디아

넷플릭스가 우리나라에 처음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필자는 첫 시즌 구독 회원 중 한 사람으로 넷플릭스 안의 여러 프로그램들을 보기 시작했었는데요. 그 시절 넷플릭스에는 국내 프로그램보다 유럽, 미국 등에서 제작한 프로그램들이 더 많았어요.

그 중에서도 저는 영국 집밥 요리 경연 프로그램을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전문 요리사가 만드는 화려하고 전문적인 음식이 아니라 우리가 집에서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을,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만들어가는 장면을 일종의 경연대회처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근사한 식재료로 평생 한 번 먹어볼까 말까한 비주얼의 요리가 아니기에 더 친근하게 봤던 것 같아요. 솔직히 때로는 귀찮을 때도 있지만, 집에서 밥을 지어먹는 평범한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아늑하고 평화로운 어떤 안정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요즘 우리나라에서 <흑백 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전 세계 구독자들에게도 입소문이 퍼진 상황이라고 하지요. 참 반가운 일입니다. 필자는 아직 이 프로그램을 매회 보지는 못했는데요. 며칠 전 '비빔대왕'으로 불리는 요리 연구가 유비빔씨가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의 선율을 <흑백 요리사> 방송 중에 불렀다는 기사를 접했고요. 그 편을 찾아서 봤습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음악 외적 이야기들, 인문학적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이런 사건을 접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지금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에서 특히나 요즘 제가 좋아하고 있는 음악가, 드보르자크의 작품을 유비빔씨의 목소리로 전 세계에 알려준 일이기도 하니까요! 평소 드보르자크의 이 작품을 좋아하던 시청자들도 반가웠을 테고요.

이런 사연에서 이번 칼럼은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이 탄생하게 된 역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했던 이야기를 먼저 읽고 이 칼럼을 읽어주시면 드보르자크의 '신세계에서'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새로운 세상과 드보르자크의 새로운 음악 세계

1893년 미국에서 초연된 드보르자크의 대표작 '교향곡 9번' 원본 악보. 사진 = 위키피디아
1893년 미국에서 초연된 드보르자크의 대표작 '교향곡 9번' 원본 악보. 사진 = 위키피디아

1892년 10월 21일 미국 뉴욕 카네기 홀에서 컬럼버스 데이 400주년을 기념해 드보르자크가 작곡했던 <테 데움>이 초연되었습니다. 드보르자크의 지휘로 300여 명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소프라노 클레멘타인 드베라-사피오, 베이스 에밀 피셔솔리스트의가 이날 무대에 올랐는데요.

이날 공연이 열리기 전에 목사부터 군인 메사츠세츠 주 하원 의원, 작가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지냈던 당시 미국의 유명 인사 토마스 웬트워스 히긴슨의 축하 연설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 개의 새로운 세계: 콜럼버스의 새로운 세계와 음악의 새로운 세계"를 주제로 약 20분 간 연설을 했는데요. 그의 연설은 꽤나 감동적이었던 모양입니다. 다음 날 <뉴욕 헤럴드>는 그의 연설을 소개했습니다.

"우리 땅의 음악적 승리는 미래에 있습니다. (중략) 오늘 밤 우리의 손님 드보르자크가 콜럼버스가 발견한 이 대륙에 새로운 음악 세계를 펼치는 일에 도움 줄 거라 믿습니다"

- <뉴욕 헤럴드> 1982년 10월 22일 자에 실렸던 토마스 웬트워스 히긴슨 연설 일부 발췌

 

이날의 무대를 시작으로 프라하에서 뉴욕으로 건너왔던 드보르자크의 본격적인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1885년 개교했던 미국 국립 음악원의 교수이자 음악원장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는데요. 이 학교의 첫 입학생은 단 30명이었지만, 1900년에 배출한 졸업생은 무려 3천 명 정도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단 15년 사이에 이토록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드보르자크의 여러 노력도 큰 역할을 했는데요. 단순히 그가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던 음악가라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선생으로 그가 실천했던 여러 행동들이 가져온 좋은 효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885년 미국 뉴욕에서 개교했던 미국 국립 음악원 전경. 드보르자크는 1892년부터 이 학교에서 약 24개월 동안 교수로 재직하며 유색 인종 학생들에게 음악을 배울 권리를 돌려줬다. 사진 = 위키피디아
1885년 미국 뉴욕에서 개교했던 미국 국립 음악원 전경. 드보르자크는 1892년부터 이 학교에서 약 24개월 동안 교수로 재직하며 유색 인종 학생들에게 음악을 배울 권리를 돌려줬다. 사진 = 위키피디아

드보르자크가 미국 뉴욕에 도착했을 때, 미국에서는 '짐 크로법'(백인과 유색 인종의 합법적인 분리 차별법)이 일반적이던 시절이었는데요. 백인 학생과 유색 인종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공부할 수 없었고, 한 식당에서 밥을 사먹을 수 없었으며, 화장실도 함께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시절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유색 인종 학생들은 피부색을 이유로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요.

이런 상황에서 드보르자크는 유색 인종 학생의 음악원 입학 허가를 강행했습니다. 당시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상당한 화젯거리였는데요. 그가 유색인종 입학 제도를 만들면서 주장한 것은 피부색이 음악을 배우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입학 공고문에 "음악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원할 수 있다", "무료 입학" 두 가지 조건을 적었는데요. 당시로서 굉장한 파격 행보였습니다.

1893년 5월 21일 자 <뉴욕 헤럴드>와 인터뷰 중 드보르자크는 "나는 미국의 흑인 멜로디에서 위대하고 고귀한 음악 유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미국의 음악가는 그들의 선율을 결국 이해하고, 감정을 일렁이게 할 것입니다"라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당시 그의 인터뷰는 드보르자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분명한 자료인데요. 그를 향한 적대적인 시선이 훨씬 지배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인터뷰를 본 유럽 클래식 음악계인사들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비난의 입장을 연이어 내놓았고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백인과 흑인의 평등한 분리가 '짐 크로법'으로 보장되던 20세기 초의 미국에서 수많은 흑인이자 예비 음악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체코의 국민 음악가 드보르자크는 뉴욕에서의 약 3년동안 그의 걸작들을 쏟아냈다. 사진 = 위키피디아
체코의 국민 음악가 드보르자크는 뉴욕에서의 약 3년동안 그의 걸작들을 쏟아냈다. 사진 = 위키피디아

이렇게 그는 유색 인종 학생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학교에서 음악이라는 공통 화제를 통해 학생들과 생활했는데요. 자연스레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원치 않는 이주를 해야 했던 유색 민족들의 정서와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작곡가인 그에게 이런 새로운 멜로디와 영감은 자연스레 새로운 작품으로 이어졌고요.

그것이 바로 유비빔씨가 흥얼거렸던 노래,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그의 마지막 교향곡은 1893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초연되었고요.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연주되고 있습니다.

음악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인류애를 몸소 실천했던 그의 멋짐! 필자가 이 작품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감상 중 하나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앞으로 이 작품을 접하실 때, 뉴욕의 드보르자크가 모든 학생들과 음악을 나누고 싶어했던 마음으로 이어진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저널리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