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서현역 부근 카페에서 김희상 번역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양찬혁 기자
지난달 22일 서현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김희상 번역가. 사진=양찬혁 기자

최근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후 번역의 중요성이 주목받고 있다. 한강의 도서를 옮긴 영국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의 공도 컸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 2004년 번역을 시작해 총 117권을 번역한 '중견 번역가' 김희상 번역가와 지난달 22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제가 2004년에 번역을 처음 맡았을 때 원고지 1매 기준으로 4500원이었어요. 그런데 현재도 4500원을 받고 있고 심지어 더 낮추자고 할 때도 있어요. 인공지능(AI)이 도입되면서 출판사들이 번역료를 최대한 아끼려는 추세도 보이고요. 특히 인문서 시장은 출판사가 이익을 얻기 힘든 구조라 더 어려워요."

김 번역가는 번역가의 처우를 설명하며 현재 번역 시장이 '알음알음' 식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편집자끼리 서로 물어보며 번역가를 찾아요. '이번에 철학책을 번역해야 하는데 누구 추천해줄 수 있어?' 이런 식이죠. 하지만 이런 시장 구조는 한계가 있어요. 신진 번역가들은 진입하기 어렵고, 기존 번역가들도 안정적으로 일감을 받기 힘들죠."

김 번역가는 이런 상황 속 최근에는 번역회사들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중견 번역가의 입지가 줄어들었다고 설명한다. 번역회사는 회원 번역가를 모집해 일거리를 중개하는 형식을 취하며, 중개 수수료를 받기 때문이다. 더불어 번역회사는 중간에서 원고를 다듬어 주는 역할도 한다. 출판사는 같은 수준의 번역료라면 번역회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로써 해당 분야를 다루어 본 경험과 전문성은 외면당하고 만다.

-번역회사들의 운영 방식에는 문제가 없나요?

"번역회사는 구조적으로 번역가와 편집자 사이에 개입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개입은 아무래도 번역가와 편집자의 소통이 원활히 이뤄질 수 없게 만들죠. 책의 질을 높이는 근본 바탕이 소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울 수밖에 없네요."

더불어 김 번역가는 출판계의 구조적 문제인 편집자들의 잦은 이직도 번역 시장과 연관돼 있다고 설명했다.

"편집자의 경력이 쌓이면 그만큼 임금을 올려줘야 하는데,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게 힘들어요. 책이 팔리지 않으니 편집자를 고용하기 어려워지죠. 편집자와 작업을 오랫동안 같이 하면 경험도 쌓이면서 책의 수준도 올라갈 텐데 편집자가 계속 바뀌니 아쉬운 상황이에요."

이런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변화도 감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번역가는 최근 번역 시장의 주목할 만한 변화로 AI 번역의 등장을 꼽았다. 그는 점차 확대되는 AI 번역의 활용에 대해 근본적 한계를 지적했다.

"AI는 패턴으로 번역하다 보니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번역합니다. 하지만 문장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는 읽어내지 못하죠. 예를 들어 물음표 하나를 봐도, 그게 수긍인지, 놀라움인지, 감탄인지, 반문인지는 맥락을 이해해야만 알 수 있어요. AI의 번역 기술이 평이한 문장은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깊이 있는 책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AI 번역은 어떻게 활용되고 있나요?

"출판사들이 외서 검토 과정에서 AI를 활용하는 모습을 봤어요. 보통은 번역가들이 외서를 읽고 검토서를 작성하는데, 최근에는 번역 사이트에서 AI가 번역한 내용으로 검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문장의 맥락과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출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어요."

이어 김 번역가는 현재 번역 검토 의뢰 방식의 문제점도 제기했다.

"현재 번역 검토 의뢰 과정의 문제점을 예로 들면, 300쪽 분량의 외서를 일주일 안에 검토해달라고 해요. 보통 이 정도 분량의 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 데 2주 정도 걸려요. 또 검토비는 20만 원 정도로 책정되는데, 나중에 그 책을 번역해 출판하면 검토비를 제외해 번역비를 주겠다고 하죠. 결국 번역가들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차례와 본문 일부만 발췌 번역해 검토서를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번역서가 출간됐을 때 처음 검토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책이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돼요."

이처럼 현재 번역계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최근에는 '한강 열풍'으로 한국문학을 위해 번역대학원대학교를 짓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다만 김 번역가는 번역대학원 설립과 함께 자격증 제도 도입과 시장 관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번역대학원대학교 설립에 적극 찬성합니다. 다만 단순히 번역대학원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면 안 돼요. 대학원을 나온 후에도 꾸준히 일감이 주어질 수 있도록 자격증 제도를 만들어 전문성을 키워주려면 정부 차원에서 시장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2, 제3의 한강이 계속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해외의 번역가 교육 제도는 어떤가요?

"독일에서는 번역가가 되기 위해 약 6년간의 전문 교육 과정을 거쳐야 해요. 문헌학과에서 문학, 인문학, 자연과학 등 학문별로 전문 교육을 실시하고, 이른바 '국가고시'를 통해 자격증을 발급합니다. 자격증을 취득한 번역가들은 정부가 직접 일감을 중개해줘요."

김희상 번역가는 이와 같은 체계적인 번역가 양성 시스템을 갖추려면 정부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지난 21년간 책과 독자들 사이에서 번역 작업으로 가교 역할을 해온 경험으로 번역의 본질을 되짚으며 인터뷰를 마쳤다.

"사람들이 번역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게 아닌, 그 안에 담긴 문화적 맥락과 깊이를 전달하는 작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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