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할리우드의 난제 중 하나는 창조적인 작업이 드물어졌다는 사실이다. <아바타>가 세상을 뒤흔든 이후 10년, 미국의 박스오피스는 슈퍼히어로 등이 나오는 시리즈물과 리메이크 영화로 채워졌다.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과거 성공했던 영화에 손을 대는 작업은 어느덧 주요한 흐름이 되었는데, 그중 선두에 서는 장르는 공포영화다.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 <미이라> 같은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엑소시스트>, <할로윈>, <나이트메어>, <13일의 금요일> 같은 모던 시리즈가 새로 선보이는 와중에 좋은 평가를 받은 예는 많지 않다. 태생적으로 하위 장르인 탓에 쉽게 접근하는 것도 문제지만, 새로운 작업에 별다른 가치나 이유를 갖다붙이지 못하는 것도 비판받을 부분이다.
이미 시리즈로 만들어졌고, 2006년에도 리메이크된 바 있는 <오멘>이 다시 관객과 만난다. 아르카샤 스티븐슨의 <오멘: 저주의 시작>이 바로 그 작품. 앞서 든 이유로 인해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과연 그럴까? 제목에서 보듯, 이번 작품은 리처드 도너의 <오멘>(1976)의 사건이 터지기 전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시대적 배경은 1971년으로 설정되었고, 그 시간에 맞춰 1970년대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미술과 촬영이 우선 돋보인다.
그런데 1970년대라는 배경은 단순히 원작의 전사가 일어나는 시간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를 형성한다. 서구의 청년 혁명 직후를 배경으로, 기성세대와 아버지의 유물이 도전받던 시간에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영화의 고민, 질문은 거기에서 시작한다. 극중 악마 숭배 집단은 이단이 아닌, 정통 교단에 원초적으로 존재했던 세력으로 스스로 규정하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꾸민 오랜 계략의 결과로 '악마의 자식'을 내세운다.
시리즈 가운데 처음으로 여성 감독이 도전한 <오멘: 저주의 시작>은 이야기의 중심을 여성에 맞춘다. 넬 타이거 프리가 분한 마거릿은 평범한 수녀에서 점차 놀라운 역할로 변모하면서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지점으로 이끈다. 사람들을 돕는 친절한 인물에서 거대한 음모의 희생자로 이어지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그가 잘못된 역사에 도전할 때 벌어진다.
앞서 나온 <오멘> 시리즈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는 아버지, 그리고 그의 권력을 이용해 악의 세력을 떨치려는 악마의 이야기 속에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품을 수밖에 없다. 반면 <오멘: 저주의 시작>은 남성이 주도한 비극으로부터 여성이 벗어나 그것에 저항한다는 점 하나로 앞으로 나올 속편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
스티븐슨 감독은 장르에 대한 예의를 다했는데, 이로 인해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호러의 고전을 떠올리게 된다. <오멘>(1976)의 충격적인 장면을 멋들어지게 변주한 것도 그중 하나이고, 필자의 경우 놀랐던 것은 <오멘>의 이듬해에 나왔던 이탈리아 호러의 고전 <서스페리아>(1977)와의 접점이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온 여성이 악의 세력에 점점 다가간다는 이야기의 구조가 그러하고, 무엇보다 클라이맥스 중 하나에서 마거릿이 악의 공간에 진입하는 부분은 거의 오마주 수준이다.
지알로 영화[편집자-이탈리아에서 양산된 싸구려 공포영화를 말함]의 팬에게는 선물 같은 장면이라 하겠다. 빌 나이, 소냐 브라가 등의 명배우가 곁에서 펼치는 호연도 영화에 품격을 더한다.
이용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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