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카모토 준지의 <오키쿠와 세계>(2023)는 일본의 영화지 '키네마준보'가 선정한 '2023년 일본영화 베스트 1위'에 올랐다. 이미 2000년 작품 <얼굴>로 1위에, 그리고 근작 <어나더 월드>(2019)도 2위에 오른 바 있어, 명실공히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가 <오키쿠와 세계>의 개봉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 2월 26일에 그와 나눈 인터뷰를 전한다.
사카모토 감독은 한국과 익숙한 인물이다. 초기 시절부터 한국을 찾아 영화를 소개했던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다룬 정치영화 <KT>(2002)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받았고, <어둠의 아이들>(2008)의 개봉 때는 봉준호 감독과 영화의 소개에 나섰다. 이번에도 봉준호와 GV 자리를 가졌던 그에게 오랜 인연에 대해 물었다.
봉준호 감독과 알고 지낸 지 24년이 됐다. 오랜 친구와 재회한 듯 반가운 느낌이 들었고, 그가 일본에 와도 사석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다. 그는 배울 게 많은 사람이다. 그 외에도 한국의 몇몇 감독과 교류해 왔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후배 감독보다 한국 감독과 더 친한 것 같다.
비단 한국의 영화인 외에도 태국, 러시아, 쿠바, 미국의 영화인 등과 공동 작업을 계속해 오면서 나라마다 다양한 제작 방식, 문화적 차이, 다른 생각을 흡수하기를 즐기는 이유는 <오키쿠와 세계>의 주제와도 다르지 않다. "감독으로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공동 작업을 선호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에 쓰인 '세계'라는 단어는 각별하게 쓰였다고 한다. "모든 것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태어난 환경 아래 주입받은 것들을 버리는 용기가 때로는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대에 벌어지는 일, 시대상을 꼭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더라도 계속 의식하면서 영화를 찍는다. 근래 몇 년 동안 벌어졌던 팬데믹 상황이 세계라는 단어를 담는 계기가 되었다. 매일 위기감을 느꼈던 디스토피아 가운데 희망을 담고 싶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의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예상했듯이 코로나의 상황은 제작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의 제작에 무려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함께 내한한) 프로듀서 하라다 미쓰오 씨가 '순환적 사회'라는 주제로 영화를 제안했다. 4년 전부터 몇 차례에 걸쳐 단편을 찍으며 제작을 도모했으나 제작비를 모으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2년 전에 영화와 관련이 없는 단체로부터 투자를 받아 제작을 완료할 수 있었다. 3년이 걸렸다고 해도 적은 제작비, 제한된 촬영 환경 속에서 실제 촬영 기간은 12일이다. 일종의 단편집에 해당하는 작업은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여러 계절의 풍성함을 담은 건 남다른 수확이다."
따로 영화사를 거치지 않았기에 사카모토 감독은 예전부터 동경했던 작업을 시도하는 계기로 이를 활용했다. '흑백 작업'이 그것이다. 상업영화의 제작사들은 저예산의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흑백영화의 제작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간섭이 없어져 가능한 일이었다. "극중 분뇨가 계속 등장해 흑백으로 찍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반대다. 흑백의 느낌을 살리기로 결정한 뒤, 촬영 전 준비과정에서 소품팀이 만든 분뇨를 보면서 흑백으로 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오키쿠와 세계>는 사무라이 가문의 딸 오키쿠와 분뇨를 나르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청년의 이야기다. <자토이치 더 라스트>(2010) 외에 주로 현대물을 만들어온 사카모토 감독이 드물게 제작한 시대극에서 막부 말기의 시대를 그렸던 일본의 명감독 가와시마 유조, 야마나카 사다오의 이름이 떠올랐다. 때마침 사카모토 감독으로부터 '가장 좋아하는 두 명의 감독이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야마나카 사다오의 <인정 종이풍선>(1937)의 영향이 깊다. 당시 촬영을 했던 사람의 마음가짐을 배워보고 싶었다. 그렇게 선택된 스탠더드 화면비율은 극중 등장하는 당시 공동주택의 공간감을 표현하는 데 탁월했다. <오키쿠와 세계>는 디지털로 찍은 영화지만, 컬러를 흑백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필름의 거친 질감을 살리도록 노력했다. 디지털의 전기신호와 필름의 화학반응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이랄까.

필름으로 찍은 옛 흑백영화에 대한 흠모는 이미지와 더불어 사운드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화면 사이즈가 작은 만큼 사운드가 옛날 영화처럼 주로 센터에서 나오게끔 작업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면 너무 단순해 재미가 없기에 몇몇 컬러 장면에는 서라운드를 적용했다. 그러니까 컬러 장면에 나오는 분뇨의 소리는 서라운드임을 밝힌다."
또 다른 중요 포인트는 여성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오키쿠와 세계>는 사카모토 감독이 남성영화들 사이에 내놓은 <얼굴>, <다마모에>(2006) 같은 여성영화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다. 오키쿠가 팬데믹 상황 아래 형성된 인물이란 점에서 <얼굴>의 주인공과 고베 대지진의 재난 상황을 연결해 질문해 보았다. "재언하자면 '어떤 세계에 사느냐'가 영화의 의식과 배경에 반영된다.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오키쿠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얼굴>에서 지진이란 재난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지 않았더라도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인물을 다듬었다."
현시대를 의식해서일까, 사카모토 감독은 여성 인물에 대한 철학을 피력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남성 인물에 내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남성상이 반영되는 것과 달리, 여성 주인공에는 내 생각을 더 깊게 표현하는 게 가능하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접근하기에 그런 결과가 나온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선배 소설가 기리노 나쓰오 씨가 해준 조언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다. 남성이 욕망하거나 바라는 바를 여성 인물에 표현하지 마라는 말씀이다."
개봉 2주차에 접어든 <오키쿠와 세계>는 평단은 물론 관객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상영 중이다.
이용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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