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속 괴수는 아무래도 고지라와 킹콩일 테다. 고지라와 킹콩의 역사는 매우 길다. 고지라는 1954년 혼다 이시로 감독의 〈고지라〉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킹콩은 무려 1933년 메리언 C.쿠퍼의 〈킹콩〉에서 처음 등장했으니, 영화사의 나이로만 따져도 거의 일흔과 아흔의 노인인 셈이다. 〈고질라〉(가렛 에드워즈, 2014)를 시작으로 시리즈 몬스터버스(Monsterverse)에 의해 고지라와 킹콩의 영화가 다시 나오기 시작한 것도 어느새 10년이 되었으니,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이제 고지라와 킹콩의 거대한 덩치에서 그다지 공포도 충격도 느끼지 않을 터이다. 익숙해진 만큼, 고지라와 킹콩은 '실물보다 작은' 생물처럼 다가온다.

애덤 윈가드의 〈고질라x콩: 뉴 엠파이어〉에서 고지라와 킹콩은 정말 실물보다 작아 보인다. 영화의 주 무대가 '할로우어스(Hallow Earth)'기 때문이다. 할로우어스에는 킹콩과 비슷한 크기의 생물체들만 서식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첫 장면 킹콩이 그와 비슷한 크기의 괴수들에게 쫓기는 장면은 마치 하이에나에 쫓기는 침팬지를 촬영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아무리 고지라와 킹콩이 친숙해졌다고 해도, 기대치를 한참 어긋나는 이런 장면은 따분하기 짝이 없다. 고지라, 킹콩 시리즈를 충실하게 따라간 관객이 아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거대 괴수물에는 응당 괴수가 거대해보이기를 바라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할로우어스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액션의 무대가 인간이 사는 곳으로 옮겨졌을 때 쾌감이 극대화되기도 한다. 고지라는 로마의 콜로세움이 자기 침실인 양 누워 잠들고, 킹콩과 만날 때는 인사에 앞서 피라미드부터 두세 개 부수고 시작한다. 이전까지 영화들에 대한 기억으로 실물보다 작게 보인 킹콩과 고지라가, 다시 한 번 실물만큼 거대한 덩치로 보이게 된다.

물론, 이것이 감독의 의도는 아닌 것 같다. 〈고질라x콩: 뉴 엠파이어〉에서 '쇼와 고지라'의 향수가 느껴진다는 팬들의 말처럼, 이 영화는 쇼와 시기의 고지라 시리즈처럼 일종의 크리쳐 대전 게임처럼 만들어졌고 거기에 충실하다. 영화 말미 부상을 당한 킹콩이 인간들이 만들어준 기계 건틀릿(Gauntlet)을 차고 다시 할로우어스에서의 전투에 임하는 것은 전형적인 '새로운 아이템 획득!' 장면처럼 느껴진다.

한편, 인간이 과학 기술을 활용해서 킹콩을 돕는 장면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필자의 생각을 멎게 했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피터 비스킨드는 대중영화의 정치학을 읽어내면서 기술 발전에 대한 믿음으로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킹콩'에서 읽어내곤 했다. 그렇다면 아주 먼 과거의 악한을 처벌하기 위해 인간의 과학과 협력하는 태곳적의 신(神)인 킹콩에서는 어떤 정치학을 읽어낼 수 있을까? 필자는 정치학은 읽어낼 수 없었지만, 기술 발전주의자들보다 훨씬 거대한 폭의 시간을 다루는 것의 쾌감을 느끼기는 했다.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과거가 아니라, 과거를 미래를 통해 극복할 때 우리가 영화에서 향유하는 시간의 폭은 너무 커지기 때문에 (아주 발전한 미래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신화적 과거까지) 콜로세움은 고사하고 피라미드조차 '근과거'가 된다. 유물들이 고질라의 침대가 되고 피라미드가 부서지는 걸 보면서 느끼는 쾌감은 물리적 쾌감일 뿐만 아니라, 시간 자체를 장대하게 다루는 데서 느끼는 쾌감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살갗에 닿는 아주 가까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잠깐 박살내준다.

글 금동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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