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는 장재현 감독이 <검은 사제들>(2015), <사바하>(2019)에 이어 만든 오컬트 영화다. 공포영화라 부르지 않고 굳이 '오컬트'를 강조한 이유는, 그가 특정 장르에 천착할 뿐만 아니라 장르적 성숙도도 아울러 쌓아 나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장르의 토양이 그리 단단하지 않은 한국에서 이는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감독이 장르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 관객은 그를 믿고 지지하는 관계가 성립된 드문 예인 까닭이다. 이러한 순환 관계는 장르의 발전에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한국의 영화 산업을 감안하면 쉬 들이댈 공식은 못 된다. 장르의 작가로 인정받는 그가 4, 5년에 걸쳐 한 작품을 발표하는 데서 보듯 만만한 길은 아닌 것이다.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무당과 파트너, 지관과 장의사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실생활에서 영적 세계까지 연결되어 있는 그들의 직업은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을 쓰게 되는 문제를 다룬다. 길흉, 죽음, 사후의 세계 같은 것들이 거론되니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지만,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점잔을 떠는 사람이라면 마냥 열광하기엔 살짝 민망한 소재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을 모를 리 없는 장재현은 도입부에서 모던시네마의 변경에 놓인 소재와 주제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인다. 무당 화림(김고은 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 과학과 종교, 미신의 중간에 놓인 존재 – 은 영화 자신의 입장표명에 해당한다.

영화적 태도는, 영화의 내적 구성력을 다지는 부분에서 우선 드러난다. 장재현의 전작들은 음습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의존하는 편인데, 이러한 요소는 호러라는 장르에 불가결한 것이면서도 자칫 허술한 내러티브를 포장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전작에서 흐린 날씨, 눈 같은 장치로 아우라를 도모했던 장재현은 <파묘>에선 그것에 그치지 않고 물질의 본질 – 원소에 접근하는 등 치밀함을 선보인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대동되는 결과, 즉 과도한 설명은 단점이자 장점이다. 이미지로서의 영화에서 언어적으로 꼭 효과적인 것만은 아니나, 미심쩍은 부분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고 세심하게 안내한다는 의도는 이해된다.

군내 나는 이야기에서 거리를 두려는 태도는 인물의 성격에도 반영돼, 무당은 피트니스 클럽에 다니고, 장의사는 기독교를 믿으며, 지관은 딸을 공학자로 키웠다. 기실 이상할 것도 없는 이런 부분은 단순히 치기 어린 설정이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슬며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전작들의 지나치게 심각하고 경직됐던 외양을 떠올려 보면 이런 변화는 반갑다. 호러의 장르 안에서 유연한 움직임을 지닐 정도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의 방증이 아닌가. 그럼에도 상기한 장르적 성숙 면에서 이러한 태도보다 더욱 평가되어야 할 것은 이야기 자체다.

<파묘>는 식상한 반전에서 벗어나 크게 보아 세 단계에 걸쳐 네 인물을 깊은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는 역사적 관점과 결합하는데, 장르 영화에서 메시지나 교훈은 김빠진 결과를 낳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퇴마: 무녀굴>(2015) 같은 영화가 좋은 의도로 역사적 소재를 끌어들이고도 거친 마무리로 관객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파묘>는 제사에 쓰이는 제물을 근거로 역사적 상황을 재론한다. 개인적 욕망을 풀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것을 넘어 타인의 희생과 피해를 불러내는 행위가 어떤 역사적 비극을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는 타당성을 득한다. 장르적 소재를 주제로 이끄는 과정에서 불려 나온 역사담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건 그래서다. 게다가 한 나라의 지도자 일당이 자기 나라와 국민보다 옆 나라를 더 흠모하는 현실 때문인지, <파묘>의 이야기는 더욱 현실의 교훈처럼 들린다.

이용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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