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 구정태(변요한 분)가 그런 사람이다. 버스 옆좌석에 앉은 사람의 핸드폰을 보지 않고는 근질거려서 못 사는 그련 유의 사람.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은 그런 그에게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거래를 원하는 사람이 맡겨둔 열쇠로 그들의 집 안을 자유롭게 뒤져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녀가 죽었다>의 도입부는 다소 불편하다. 아니, 도입부를 지나 중반부로 이어질 때까지 그런 불편함은 계속된다. 스토킹이 엄연한 범죄인 마당에, 구정태가 내레이션으로 자신을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 좋은 얼굴과 목소리로 자기 행위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군다. 꺼림칙한 일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목 그대로 또 다른 주인공인 한소라(신혜선 분)가 죽는다. 물론 그녀는 어떤 형태로든 영화 속으로 귀환할 것이다. 주인공이 초반에 사라지고 끝나는 영화는 없을 테니까. 그 지점에서 <그녀가 죽었다>는 장르 영화로 방향을 트는데, 이러한 설정은 구정태라는 인물에게 일종의 벌처럼 느껴진다. 미소 지으며 상대방을 염탐하던 인간이 응당 받아야 할 난처하고 힘겨운 상황. 영화는 여기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질문을 뒤로 밀어내고, 한동안 장르에 충실을 기한다. 크게 보아 반으로 나뉜 영화에서 여러 사건이 벌어지고, 인물의 이면이 드러나고, 일종의 반전이 전개됨으로 인해 영화의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따로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관객이 그 속으로 쑥 빠져들게 만든다. 시계를 볼 틈을 주지 않는 건 대중영화의 미덕에 해당한다.

작년에 개봉한 <너를 줍다>는 <그녀가 죽었다>와 일정 부분을 공유한다. 평범한 직장인인 한지수(김재경 분)는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를 줍고 분석한다. 그녀의 컴퓨터에 쌓인 타인들의 쓰레기 사진은, 구정태가 별도의 공간에 붙여둔 타인의 소지품 사진과 다르지 않다. 한지수와 구정태는 그 물건들의 사진으로 그들을 안다고 착각하고, 그들의 일부를 소유한다고 여긴다. 그것이 단절된 삶의 방증일 뿐인데도 자각하지 못한다. 이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두 영화의 주제와 별개로, 그들의 타인을 향한 태도와 마음은 내내 불편한 찌꺼기를 남긴다. 그건 지켜야 할 경계의 침범인 것이지, 이해받지 못한 진심이라는 핑계로 넘어갈 일은 아닌 게다. 어쨌든 그 찌꺼기는 영화라는 그릇 안에서 해소되어야 한다. <너를 줍다>가 그것을 하지 못했다면, <그녀가 죽었다>는 반대의 경우다.

연출을 맡은 김세휘는 그간 몇몇 영화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던 이력에서 보듯 이야기의 구성에 신뢰가 가는 인물이다. 구멍처럼 보이던 설정들이 뒤로 가면서 스스로 설득력을 구하는 게 그러한 부분이다. 이야기에 함몰하지 않고 자기 각본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결과라고나 할까. 제일 마음에 드는 점은, 소재와 인물이 지닌 불편함에 대해 기어코 답하는 부분이다. <그녀가 죽었다>는 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극의 한 지점에서 구정태의 눈이 공격을 받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타인을 바라보는 데 적극적이던 남자의 문제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데 있다. 온갖 미디어와 SNS를 통해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과할 정도로 채워지는 시대에, <그녀가 죽었다>의 주제는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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