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라듐 연구로 마리 퀴리와 그의 남편 피에르 퀴리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시상이 시작된 지 3년 만의 일이었고 마리 퀴리는 최초의 여성 수상자였다. 퀴리 부부 특히 마리 퀴리에게 대중의 관심이 쏠렸고, 기자들은 마리 퀴리에게 어린 시절 혹은 노벨상 수상 심경 같은 이야기를 청했다.
마리 퀴리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에서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물질입니다." 퀴리 부인을 둘러싼 인상적인 일화는 이외에도 여럿 있다. 마리 퀴리는 라듐의 특허권을 '과학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포기했다. 이후 마리 퀴리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엑스선 장비를 실은 자동차 '리틀 퀴리'를 타고 전선을 딸과 함께 누볐다.
이 일화는 모두 남영 작가의 『휘어진 시대』 1권에 소개된다. "사람이 아니라 물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퀴리 부인에게는 쓸 데 없는 사족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퀴리 부부가 방사능의 개척자적 연구를 해서 노벨상을 받았다는 건조한 사실만 알고 있었던 필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웠다. 비록 퀴리 부부의 일화만 소개했을 뿐이지만 20세기 전반을 다룬 『휘어진 시대』에는 그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원고를 빼곡히 채울 만큼 여러 인물이 각자의 비중을 갖고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또한 퀴리 부부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이 책을 호사가의 취향을 채워주는 '위인전' 묶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될 터이다.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그 이야기들이 서로 씨줄과 날줄로 엮이고 결국 '과학사(科學史)'라는 역사로 도약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포착하게 되는 '과학사'는 일반적인 연구사—어떤 연구의 결과가 새로운 연구로 이어지는 논리를 추적하는 방식—와 함께, 과학자들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 접촉하고 불화하며 어떻게 연구 영역에 접촉하고 발견/발명에 다가가는 모습이 보이니, 추상적이라기보다 세밀하고 실감으로 가득하다.
『휘어진 시대』의 작가 남영은 스스로를 '잡종'이라 부르며, '잡종'이라는 가벼운 단어를 통해서 '학제간 융합' 따위의 무거운 어감으로는 섞이기 어려운 것들 이상이 뒤섞이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그러한 '잡종'으로서 자의식의 결과인지, 혹은 2차대전을 전후로 하여 과학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변화 때문인지, 이 책의 3권에 이르면 과학자가 아님에도 과학의 역사에 개입하는 숱한 정치인, 군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은 '과학사'인 동시에 20세기 유럽과 미국의 사회사—특히 전쟁사의 입문서처럼 읽히기도 한다.(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상상해보라!) 기실 20세기를 정말 '20세기'이게끔 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 중에서도 특히 2차 대전에서 과학자들은 배경인 동시에 주역(主役)이었으니 당연한 일일 터이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과학(사) 영역의 전문 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을 기존의 같은 분야 도서 사이에서 정확히 위치 지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는 필자의 한계인 동시에 책의 장점이다. 지금까지 흥미진진하다거나 탁월하다는 둥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듯이, 과학의 문외한인 필자임에도 이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원자폭탄… 이들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오늘날의 교양이다. 이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시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휘어진 시대』를 펼쳐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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