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롱의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낸 다섯 편의 영화
인기가 엄청났던 만큼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본인 이름으로 등장한 마지막 작품 <어떤 유사성>(2019)까지 100여 편의 작품에 나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몇 편을 추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한 <태양은 가득히>는 일부러 제외했고, 그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을 무렵의 작품 중에서 다섯 편을 꼽았다. 혹시 이름으로만 그를 안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좋겠다.

<태양은 외로워 L'eclisse>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962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는 <정사>(1960), <밤>(1961)을 잇는 소외 3부작의 마지막 작품 <태양은 외로워>의 주인공으로 알랭 들롱을 선택했다. 원제는 <일식>이지만 <태양은 가득히>의 인기로 인해 저런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3부작 중에서도 가장 양식화된 이 영화에서, 들롱은 모니카 비티와 상반된 이미지로 빼어난 구성물을 이룬다. 머리카락 색깔부터 세상을 대하는 자세까지 모든 게 다른 두 인물과 배우는 그것만으로 영화의 주제를 완성한 셈이다.
고독과 소외의 주제에 천착했던 안토니오니가 고독한 이미지의 들롱을 선택했는데, 정작 그의 역할은 손만 대도 바스락거리며 부서질 것 같은 비티와 어긋나는 생생한 인물로서 궁합을 맞췄다는 게 색다르다.
<태양은 외로워>는 안티 로맨스의 모더니즘 영화다. 여자와 남자는 제대로 만나지 않았기에 헤어질 일도 없다. 로맨스의 시작도 없고, 슬프거나 행복한 결말도 없다. 영화 내내 두 사람이 잠시라도 웃으며 보낸 시간은 다 합쳐도 몇 분이 채 되질 않으며, 게다가 그런 장면조차 가식적이다.
그러니까 이건 애초에 로맨스 영화가 아니었던 거다. 밤거리의 부유하는 가로등 불빛처럼 그들은 부유하는 존재다. 다리가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사람들. 저녁이 오고 다시 가로등이 밝게 켜진다. 남자도 여자도 약속한 시간 8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밤이 깊어지면, 다시 그들은 그렇게 또 떠다니는 존재로 남을 것이다.

<사무라이 Le samouraï> 장 피에르 멜빌, 1967
장 피에르 멜빌은 간략하면서 강렬한 필모그래피의 끝 무렵에 만든 세 편의 영화 <사무라이>, <암흑가의 세 사람>(1970), <형사>(1972)의 주연으로 알랭 들롱을 끌어들였다. 특히 <사무라이>에서 멜빌이 안겨준, 정글의 호랑이마냥 고독한 이미지는 한 배우에게 찬란하며 거대한 선물에 다름 아니다.
멜빌은 영화의 색채마저 들롱의 눈빛에 맞췄는데, <사무라이>에서는 빛이 바랜 녹슨 청록색을, <형사>에서는 연푸른색 톤을 입혔다. 푸른 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영화가 들롱의 캐릭터와 어울린다는 점은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다.
<사무라이>는 당시 한국에서 제목으로 인해 개봉하지 못했고, 이후 <고독>, <한밤의 암살자> 등의 제목으로도 불린다. 들롱은 과묵한 이미지로 일관하는데, 105분 상영시간의 영화에서 그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10분이 지나서다. 극중 등장하는 여러 프로페셔널은 심지어 눈빛도 교환하지 않는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그냥 알아서 몸으로 일하고 처리하는 옛 아날로그의 세계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4월 4일 토요일의 오후 6십부터 다음날 일요일 오전 6시 15분 전까지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40분에 걸쳐 하나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전과 후를 해부도를 그리듯이 펼쳐놓는데, 거침없는 손길에서 멜빌은 차가운 살인자보다 더 냉혹해 보인다.
들롱은 멜빌 외에도 여러 감독의 프렌치 누아르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다. 다소 감상적인 부분이 특색인 장르의 대표작들과 달리, 멜빌 영화가 독보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클럽 피아니스트 장면에서 보듯 오우삼의 <첩혈쌍웅>(1989)이 캐릭터 면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짐 자무쉬의 <고스트 독>(1999)은 오마주에 가깝다.

<태양은 알고 있다 La piscine> 자크 드레이, 1969
요즘은 원제인 <수영장>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으나, 예전에는 <태양은 알고 있다>로 알려졌다. 이유는 물론 <태양은 가득히> 때문이다(들롱에 대해 말하면서 <태양을 가득히>를 언급 안 하는 건 불가능하다).
한글 제목도 그렇거니와, 이 영화 자체가 <태양은 가득히>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태양은 가득히>에서 공연했던 모리스 로네가 출연한 것도 그렇고, 그와 들롱이 맡은 역할과 극중 벌어지는 사건을 보노라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질 정도다. 이전 작품들에서 싱그러운 젊음을 과시했던 들롱은 부쩍 성숙해진 서른 중반의 모습으로 나온다.
이 영화는 들롱이 로미 슈나이더와 공연했다는 점에서도 기억될 만하다. 그들은 한때 연인이었으며, 들롱은 평생에 걸쳐 그녀에 대한 애정을 지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재미있는 건, 두 사람이 극중 맡은 역할이 실제 상황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채 연인 관계로 지내고 있으며, 극의 말미에 이르러 모호하게 관계를 결말 짓는 것도 실제에서 따온 느낌을 준다.
영화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풀장 옆에 수영복 차림으로 누운 들롱의 몸으로 시작하는데, 그 위로 갓 수영장에서 나온 로미 슈나이더의 차가운 몸이 겹쳐진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태양만큼 뜨거운 열기를 실제 관계와 비교해 보는 건 악취미일까.
유명 각본가인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원안에 공동 참여해서 나온 오리지널 각본 작품인데, 이후 다른 작품들이 이 영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계속 만들어지곤 하는 점이 눈에 띈다. 프랑수아 오종의 <스위밍 풀>(2003), 루카 구아다니뇨의 <비거 스플래쉬>(2015)가 그런 작품들이다(전자는 심지어 그레디트에 원작자의 이름도 올리지 않았다).

<볼사리노 Borsalino> 자크 드레이, 1970
자크 드레이의 영화를 두 편이나 포함시키다니. <태양은 알고 있다>를 꼽은 게 마리아 슈나이더 때문이라면, <볼사리노>에는 장 폴 벨몽도가 들롱과 공연한다. 벨몽도는 여러모로 들롱과 비교되는 스타다. 나이도 비슷하고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에 나란히 활약했지만, 다른 점도 많았다.
부유층에서 태어난 벨몽도는 고다르, 샤브롤 등의 영화에 출연하는 바람에 '누벨바그의 기수' 중 한 명처럼 여겨졌으며, 나중에 코미디 영화 등 장르 전반에 걸쳐 활동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을 한 작품에 출연시키는 게 쉽지 않았을 터, 드디어 그들이 만난 게 <볼사리노>다. 두 남자가 주먹으로 맞붙는 장면에서 당시의 관객이 내질렀을 환호가 짐작 가능하다.
1930년대 마르세이유를 배경으로 한 <볼사리노>의 전반부는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스팅>(1973)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갱스터가 활개 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두 댄디한 남자 콤비의 멋들어진 조화, 그리고 그들이 악당 두목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는 설정이 그러하며, 심지어 거장 클로드 볼링의 음악이 <스팅>의 그 유명한 주제곡과 비슷한 분위기를 냈다.
하지만 날 것의 느낌이 더 강한 <볼사리노>는 중반에 접어들며 세르지오 레오네, 브라이언 드 팔마 등의 감독이 만든 모던 갱스터와 같은 피를 나눈다는 인상을 준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은 아니지만, 들롱과 벨몽도의 멋들어진 연기를 보는 맛이 대단하다.

<암흑가의 두 사람 Deux hommes dans la ville> 조세 지오바니, 1973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들롱이 여자보다 남자 배우와 공연한 버디 무비에 더 어울렸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장 폴 벨몽도, 리노 벤츄라와 공연한 영화도 좋았으나, 들롱과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 장 가뱅이었다.
다른 세대의 두 배우가 <지하실의 멜로디>(1963)에서 보여준 파트너쉽은 기막힌 것이었고, 그 호흡은 <암흑가의 두 사람>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외국에서의 평가에 비해 한국과 일본에서 유달리 큰 인기를 끌었던 편인데, 거기에는 지독히 안타까운 영화의 엔딩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 하겠다.
다만 한글 제목이 생뚱맞은데, 영화의 내용과 전혀 안 맞는 이 제목은 짐작하듯이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 따온 것이다(원제는 '도시의 두 남자'란 뜻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한글 제목은 이상한 게 참 많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들롱은 걸작의 시대를 지나 남성 취향의 대중영화에 집중하면서 프렌치 누아르의 역사를 써 나갔다. 그 결과, 들롱이라는 이름만으로도 프렌치 누아르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범죄자가 갱생하는 길을 돕는 훈육관, 남편이 갇힌 감옥 벽 앞에서 10년 동안 그가 좋아했던 음악을 레코드로 틀어온 부인, 그리고 잘못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 주는 정서는 어딘가 신파적인 데가 있어, 옛날 한국 영화 팬들이 각별히 좋아한 게 아닐까. 중반부터 벌어지는 설정도 <레 미제라블>을 연상시키는 등 여러모로 우리 정서와 맞다. 범죄에 대한 심오한 철학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인권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 알랭 들롱 추모 ① [영화평론]
- 첫 금메달, 이후 16년…'야구의 날' 올해 풍경은
- 지적이고 위트 넘치는 연기 입문의 고전 [북 리뷰]
- 예술, AI는 안 되고 인간은 되는 이유는
- '러브 라이즈 블리딩' : 여성의 육체로 다시 쓴 누아르 [영화평론]
- 분단의 상황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하이재킹'vs'탈주' [영화평론]
- 제18회 김유정문학상 배수아 작가 '바우키스의 말'선정
- '서울의 숨결, 국악의 물결' 2024 서울국악축제 17일 개막
- 부산시립극단 가족뮤지컬 '신데렐라: 너의 뜻대로' 공연
- 세종문화회관, 일레인·PATZ 꿈의 숲 밴드 콘서트 개최
- '7개국 10여팀' 2024 아시아송 페스티벌 오는 10월 26일 개최
- 아르코, 9월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 주요 공연 공개
- 제2회 최인호청년문화상 수상자 '파묘' 장재현 감독 선정
-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전,란' 선정…박찬욱 감독 제작 참여작
- 법제처, 한글날 맞이 올해의 알기 쉬운 법령 용어 3건 선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