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문화비평가……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탈영토적(extraterritorial) 지식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대표작 『영화의 이론』(김태환, 이경진 역, 문학과지성사, 2024)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최근 그의 또 다른 영화 대표작인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장희권, 새물결, 2022)까지 출간되었다.

지금까지 크라카우어는 한국인 영화 평자들에 의해 은근하게 인용되곤 했다. 천만 영화의 정치학에서 반동적인 제스처를 읽어낼 때나, 번뜩이는 물질성에서 네오리얼리즘을 거론할 때 그 어딘가에는 크라카우어의 이름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크라카우어의 주저인 『영화의 이론』이 번역된 것은 영화를 지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에게 적잖이 기쁜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크라카우어의 『영화의 이론』은 1960년 발간되었다. 그러나 크라카우어가 『영화의 이론』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인 1940년으로 알려져 있다. 크라카우어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쓴 이른바 「마르세유 초고」가 1940년 6월부터 다음 해 2월에 걸쳐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크라카우어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20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거의 20년 동안 집필한 『영화의 이론』이 그의 대표작이 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라카우어에게 영화는 단연코 사진에서 진화한 것이다. 창작자에 의해 외부 현실을 창조적으로 재생산하는 기존의 회화와 같은 예술과 달리 사진은 외부의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현한다. 캔버스 전체에 화가의 손길이 고루 닿은 회화와 달리,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제외하면 카메라가 만든 사진에는 사진사의 개입이 전혀 없다.

이러한 사진의 속성은 당대에 사진을 예술이게끔 하는데 방해가 되곤 했다. 그러나 크라카우어는 오히려 '물리적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착상시키는 사진의 속성에서 사진 그리고 사진의 진화인 영화 예술의 근원을 찾는다.

그러므로 크라카우어는 상식적으로 영화에서 강조점을 두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카메라가 만들어낸 이미지-물리적 현실에 강조점을 둔다. 크라카우어는 영화(에서 이야기)를 읽는 게 아니라, 영화(에서 이미지)를 보게 한다.

다만 이를 단지 크라카우어가 카메라의 기록과 그 결과인 이미지에만 몰두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극단적인 클로즈업이나 다중 노출·고속 촬영의 기법은 물론 물리적 현실의 재현이지만, 우리가 '리얼하다'고 하는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대상과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낳는다. 영화에서도 클로즈업과 슬로우 모션 등은 세계에 분명 존재하지만 우리의 시지각이 관습적으로 무시하는 세상을 열어주지 않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크라카우어가 『영화의 이론』의 부제를 '물리적 현실의 구원'이라고 한 것은 정당하다. 카메라는 우리의 눈이 인지하지 못하는 물리적 현실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크라카우어의 책은 1940년에 집필되기 시작해서 1960년에 발간되었다. 영화사의 시간에서 보자면, 그 시기는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고 새로운 영화들, 소위 '현대영화'가 출현하던 시기였다. 내러티브가 아니라 이미지로 초점이 '의식적으로' 옮겨가던 그 시기에 『영화의 이론』이 집필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크라카우어가 영향을 받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대한 찬사를 빌려) 『영화의 이론』이 아직 쓰여지지 않은 현대영화의 서론처럼 집필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금동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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