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벨의 150주년 생일파티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설명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는 한 가지 전통이 생겼습니다. 서양 음악사를 빛낸 음악가들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해와 다가올 새해의 끝자리 수를 맞추어 기념하는 일인데요. 참 아주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들, 가령 모차르트의 '레퀴엠',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등도 초연했던 해의 끝자리수를 맞추기도 합니다.
가령 올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인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을 맞아 전 세계에서 라벨의 작품들이 평소보다 더 연주되거나 라벨을 기념하는 행사 등이 열립니다. 필자의 시선에서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라벨 탄생 150주년 기념 관련 행사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라벨 전곡 음반 발매 소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성진 씨는 올해 라벨의 작품만으로 구성한 독주회도 열고요. 물론 조성진 씨가 올해를 겨냥해 음반을 준비한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그러나 음반 제작사는 올해 발매하는 것을 기획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이밖에도 라벨의 유명 작품들도 평소보다 더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라벨을 소개할 때 필자가 좋아하는 표현이 있는데요. '관현악의 연금술사'라고요. 그가 남긴 작품들은 20세기 관현악의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고요!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세계를 담았다고요. 이전에 어떤 작곡가도 시도한 적 없었던 작풍과 아이디어와 여러 아름다운 음악적 요소들이 라벨만의 관현악 작품들에 남아 있고요. 그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은 <볼레로>인데요. 이 작품은 클래식 음악 작품 중에서 저작권료로도 유명세를 치룬 작품이기도 합니다.
라벨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작품의 저작권료의 행방에 대해서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거든요. 요즘 유행하는 요약으로 설명하자면요. 라벨의 <볼레로>가 벌어들이는 엄청난 저작권료에 얽히고설킨 그런 어느 나라에나 있을법한 이야기라고 알아두셔도 좋겠습니다. 그 사연이 너무나도 방대하고 사실이라 알려진 이야기들도 서 너 가지입니다. 이제 저작권료는 만료가 되었으니 더 이상의 가십은 나오지 않겠지만요.
서양 음악가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어린 시절의 영재성 발견인데요. 라벨도 그랬습니다. 14세에 뛰어난 음악 실력을 인정받았고요. 파리 국립 음악원에 입학, 당시 유명한 음악가였던 가브리엘 포레에게 음악을 배웠거든요. 특히 피아노와 작곡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는데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등을 이 시기에 작곡했고요.
당시 청년 작곡가 라벨은 음악가로의 경력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던 로마 대상에 열심히 도전했는데요. 로마 대상은 오늘날로 치면 올림픽 금메달, 야구로 치면 그랜드 슬램과 같은데요. 그러나 부정 심사 사건에 휘말려, 라벨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첫 해 2등 수상을 제외하고, 두 차례의 도전에도 결국 로마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때의 상처로 라벨은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려는 모든 상을 거부했습니다. 안타까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프랑스의 작곡가로 기억되고 있지요.
그의 대표작품은 참 많습니다만. 필자가 라벨에 대해 독자들께 알리고 싶은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발레용 작품으로 위촉받아 작곡한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제2번>입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다프니스와 클로에 제2모음곡>에 대해 "라벨 최고의 성과이며, 동시에 모든 프랑스 음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다"라고 극찬한 바 있는데요. 귀한 시간 중 제 칼럼을 읽는 독자들께 라벨의 걸작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한 번 쯤 들어보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소개합니다.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내려앉을 듯 쿵쾅거리고, 영혼이 녹아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아.(중략) 그래도 다시 클로에에게 키스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승리인가. 이 얼마나 알 수 없는 병인가. 병명조차 알 수가 없네.
『샤갈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중에서
1909년 라벨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예술 감독을 맡고 있었던 발레단 발레뤼스를 위한 발레 음악을 위촉받았습니다. 발레뤼스 발레단은 1909년 5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창단, 1929년까지 유럽과 미국 전역을 순회한 러시아 출신의 무용가가 활동했던 순회 발레단인데요.
클로드 드뷔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 유명 음악가들에게 작품을 위촉, <이고르 왕자>(1909), <목신의 오후>(1912) 등 당대 최고의 발레 작품을 발표해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재정 등 문제로 결국 파산했습니다.
발레 대본은 고대 그리스인 롱고스가 썼다고 알려진 <다프니스와 클로에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고요. 초고를 완성할 때까지 매일 새벽 3시까지 작곡에 매진한 라벨은 엄격하고 까다롭게 계획한 구성에 발레를 위한 교향곡을 썼는데요. 라벨은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를 충실히 재현하는 음악적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했다고 밝혔는데요.
이렇게 2~3세기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서 염소치기 소년 다프네스와 양치기 소녀 클로에의 사랑을 중심으로 사랑, 위기, 환희 등 전형적인 서사 문학의 씨앗이 된 이야기에서 한 편의 발레 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제2번, M.57b>이 완성되었습니다.
1911년 라벨은 발레 작품의 초연을 앞두고, 몇 곡을 골라 오케스트라를 위한 <다프니스와 클로에 제1모음곡>을 발표했는데요. 반응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수정 후 발표한 발레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1912년 6월 8일 프랑스 파리 샤틀렌 극장에서 첫 선을 보였으나, 역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고요.
이듬 해 라벨은 다시 작품 속 곡들을 엮어 <다프니스와 클로에 제2모음곡>을 발표했습니다. 그제야 폭발적인 청중의 환호를 받았는데요. "내 모든 비밀을 털어놓으니, 음악 속 감정들이 청중에게 분명해졌다"는 기쁜 소감을 남겼습니다.
라벨의 표현처럼 이 작품만큼 라벨의 작품 세계를 가까이 만나볼 수 없는 작품도 없을 것입니다. 인터넷에서도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고요. 끝으로 제가 쓴 이 작품에 대한 프로그램 노트를 덧붙입니다. 라벨의 탄생을 축하하는 올해 꼭 한 번 시간을 내어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제2번, M.57b>
편성
플루트 3(제2·제3 플루티스트는 피콜로를 겸함), 알토 플루트, 오보에 2, 잉글리시 혼 2, 클라리넷 2, E♭클라리넷, 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3, 콘트라바순, 호른 4, 트럼펫 4,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타악기(베이스 드럼, 캐스터네츠, 심벌즈, 글로켄슈필, 작은 북, 탬버린, 트라이앵글), 하프 2, 첼레스타, 현 5부
연주 시간 약 15~17분
I. Lever du jour 해돋이
쉴 새 없이 빛나는 하프가 무척 신비롭다. 일출 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듯, 소년 소녀의 행렬이 신성한 숲 가장자리에 있는 초원으로 들어갑니다. 다프니스의 음악은 미묘하고 우아하고요. 피콜로가 떠오르는 해와 함께 다프니스를 깨웁니다. 하프와 목관 악기들은 어린 연인을 서로의 품을 향해 이끌고요. 밝은 아침 햇살과 함께 점점 또렷해지는 현악기의 노랫소리는 라벨의 연금술에 빠져든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II. Pantomime 판토마임
늙은 양치기 램몬은 오보에의 목소리로 등장합니다. 이어 두 대의 오보에와 잉글리시 호른이 클로에를 일으키고, 목신 판으로 변장한 다프니스가 엉뚱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릅니다. 완강히 고백을 거절하는 클로에의 마음은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대화로 이어지고요. 하이라이트인 클로에의 춤은 플루트 솔로와 함께 빛을 발합니다. 결국 다프니스의 품에 안긴 클로에는 트럼펫의 선율에 맞춰 감사의 제사를 올리고요. 이후 젊은 여성과 남성들이 탬버린을 치며 기쁨의 춤을 춥니다.
III. Danse générale 일동의 춤
다소 횡설수설하는 듯한 리듬은 불규칙하고 퉁명스럽지만 가장 신이 나는 대목입니다. 발레 공연에서 이 악장은 무용수들에게 생소하고 난해한 리듬으로 다가가고요(5/4박자). 그러나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행복한 사랑의 결말은 모든 악기가 기쁨과 황홀에 차오르는 감정을 강렬히 노래하며 끝납니다.
| 참고 문헌
『샤갈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롱고스 지음, 마르크 샤갈 그림, 김원중, 최문희 옮김, 세미콜론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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