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 2일 시작해 오는 11일까지 열린다. 올해로 29회째다. 올해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의 작품부터 아시아영화, 한국영화 신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이보다 더 좋은 진수성찬이 없겠으나, 막상 어디서부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중 유럽권 영화를 중심으로 여섯 편의 추천작을 소개한다. 영화제 수상작들이라 안전한 선택인데다 만족도도 보장하는 작품들이다.

<4월 April>

감독 데아 클룸베가쉬빌리 / 제작국가 조지아 등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쿨룸베가슈빌리는 조지아 영화의 별이자 현재 가장 절실한 여성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데뷔작 <비기닝>에는 신체적 위해를 입은 여성이 등장하는데, 감독은 그것이 한 여성의 심리적 외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4월>에서 풀어낸다.

두 영화는 폭력적 성관계가 여성에게 가하는 생존적 위협을 까발린다. 잔인한 4월에 일어난 의료 사고로 실직의 위기에 처한 니나에겐 비밀이 있다. 그는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신음하는 여성들을 외면하지 못해 스스로 고난을 짊어진다. 그들에게 몸의 권리는 없다.

4:3 화면비율은 사회, 종교, 문화적 굴레에 갇힌 인물의 현실을 대변하고, 굳건하게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는 인물과 감독의 강렬한 의지를 뒷받침한다. '삼신할머니, 예쁜 꽃, 시골 도로'를 횡단하는 침묵의 잔혹사 <4월>은 짓밟힌 몸에 관한 실로 통렬한 기록이다.

<엠파이어 The Empire>

감독 브루노 뒤몽 / 제작국가 프랑스 등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부산영화제가 두 번째 작품을 소개하고 어언 25년, 뒤몽은 독보적 거장이 되었다. 그런데 <위마니테>를 처음 보았을 때의 아찔함은 그대로여서, 그는 지금도 손에 잡히지 않는 작가다. 몇 가지 천착하는 주제들은 문자로 포착하는 걸 쉬 허락하지 않는다.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신작은 거기다 당혹감까지 더한다. 유일한 코미디였던 <슬랙 베이>를 넘어 코믹어드벤처와 스페이스오페라를 시도했다면 믿어지는가. <스타워즈>를 패러디하고 <듄>에 농을 던지는 걸로 모자라 바흐마저 주무르려는 짓궂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신성 인간, 선과 악, 육체와 영혼' 등의 주제를 빠트리지 않은데다, 우주에서 온 두 세력 '0s와 1s'의 대결을 통해 디지털 세대의 미래까지 포섭하고 있으니 역시 뒤몽이라 말할밖에. 그는 끝까지 의심하면서도 인간의 손을 잡는 철학자다.

<다잉 Dying>

감독 마티아스 글래스너 / 제작국가 독일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등 3개 부문 수상, 독일영화상 작품상 등 4개 부문 수상

베를린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다잉>의 주인공이 말한다. "모두가 행복할 자질을 지닌 건 아냐". 글라스너의 인물은 미지근한 사랑이나 행복을 좇느니 고통과 불행을 택한다.

3시간여의 대작 <다잉>은 여섯 챕터 – 리시, 톰, 엘렌, 가는 선, 사랑, 삶 – 를 거치며 인간군상이 당면한 삶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질병과 죽음, 가족과 직업 등을 다루며 굳이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는 건 감독의 의도 같은데, 그는 아름다운 관계와 올바른 삶의 방식을 억지로 꾸미지 않는다.

극 중 연주 음악의 표제가 영화의 제목인 데서 보듯, <다잉>은 예술의 입장에서 각자의 심연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를 주제로 삼는다. 대표작 <자유 의지>의 딜레마는 <다잉>의 클라이맥스에서 되풀이되는데, 영화는 놀랍게도 논쟁적인 전개로 응한다. 예술은 모범답안의 제시와 상관없는 일이다.

<천국의 옆 마을 The Village Next to Paradise>

감독 모 하라웨 / 제작국가 소말리아 등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 뮌헨영화제 특별언급

낙원의 옆 마을은 어떤 곳일까. 천국과 비슷할까, 아니면 신이 천국을 만들다 바로 옆에서 포기한 땅일까. 전통 사회와 개인, 가족의 갈등을 다룬 다수의 아프리카 영화와 달리, <천국의 옆 마을>은 왜곡된 채 전개되는 근대의 풍경에 적응해야 하는 인물을 내세운다.

부족한 일자리와 해결되지 않는 생활고, 사라지는 선생과 문을 닫는 학교, 시골 마을까지 다가온 테러의 위협, 드론 공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미래를 위협하는 정체불명의 변화 앞에서 영화는 다시금 삶에 대해 질문한다.

영화는 심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을 닮아 내내 담담한 자세를 견지한다. 황무지의 흙먼지처럼 건조하게 느껴지겠으나, 그게 오히려 딱딱해진 마음을 서걱서걱 건드린다. 신성 모 하라웨는 스치듯 지나가는 마지막 미소에서 올해의 표정을 보여준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The Other Way Around>

감독 호나스 트루에바 / 제작국가 스페인 등

칸영화제 감독주간 라벨유로파시네마상

어둠 속에서 두 목소리만 들린다. 알레 아버지의 지론대로, 알렉스는 "파티는 헤어질 때 한다"고 결정한다. 14년 차 커플은 행복하게 헤어질 수 있을까. 여름이 끝나는 9월 22일의 파티를 향해 날짜는 다가간다.

영화는 때때로 알레가 만드는 영화의 순간으로 환기되는데, 그것은 여타 '영화와 현실의 은유, 극중극'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건 삶의 예술인 영화의 효용성에 대한 언급처럼 보인다.

니체, 쇼펜하우어부터 베리만과 울만, 큐커, 스터지스, 혹스, 맥커리, 트뤼포의 무덤까지 이어지는 대화의 성찬 사이에서 길을 잃을 일은 없다. 넉넉한 만큼 치열한 트루에바의 영화는 '관계의 진실'이란 주제 깊숙이 도달하기 때문이다.

극장을 나선 뒤 키르케고르의 <반복>을 손에 쥔다면 깨달음의 행복마저 얻을 터, 더 바랄 게 없다.

<버림받은 영혼들 The Damned>

감독 로베르토 미네르비니 / 제작국가 이탈리아 등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최우수감독상

세 편의 다큐로 성공을 거둔 미네르비니가 드라마로 복귀해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의 감독상을 받았다. 그는 타자의 눈으로 미국 사회의 토양을 파헤치고 있는데, <버림받은 영혼들>에서는 남북전쟁의 시기로부터 근원적 성찰을 도모한다.

대상에 들이대는 촬영은 여전해서, 영화는 1862년에 찍은 다큐처럼 보인다. 국경으로 파견된 정찰군은 미지의 땅에서 신념을 시험받는다. 신은 자기편이라는 믿음 아래, 보이지 않는 적을 끊임 없이 상정하는 상황이 낳은 거대한 아이러니, 미네르비는 그 의문의 기원에 도달한다.

총격 신이 7분여에 불과한 영화는 전쟁 역사극이라기보다 서부영화의 재고(再顧)에 가깝다. 기병대와 공동체를 이끌던 영웅은 사라지고, 방향을 잃고 지친 소수의 병사가 황야와 설원을 떠돌 뿐이다. 서부의 백인 신화를 허위로 만드는 사려 깊은 웨스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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