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그룹과 DL그룹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여천NCC가 이달 말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놓였다. 한화는 지역사회와 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1500억원 자금 지원을 결정했지만 DL그룹은 워크아웃을 주장하고 있어 그 배경이 주목된다.
8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여천NCC는 석유화학 업황 악화에 따른 적자 누적으로 이달 말까지 약 3100억원의 자금이 부족한 상태다. 회사채 발행과 대출 등 자금 조달 창구가 모두 막히면서 오는 21일까지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부도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앞서 한화솔루션은 지난 7월30일 이사회 결의를 통해 1500억원 규모의 자금 대여를 결정하고 DL 측에도 동일한 수준의 지원을 요청했다. 한화는 여천NCC가 단기 자금만 확보되면 정상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번 사태가 '디폴트'로 이어질 경우 지역사회, 근로자, 정부가 추진 중인 석유화학 구조조정에 부정적인 파급 효과를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선제적 자금 지원을 통해 회생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DL그룹은 여천NCC의 경영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자금 지원 없이 워크아웃 절차에 돌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지난 4일 이해욱 DL그룹 회장과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을 비롯한 양측 최고위 경영진이 비공개로 만나 사태 해결을 논의했지만 입장 차이만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그룹 김동관 한화 부회장을 포함한 총괄 책임자 간 직접 논의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DL 측의 완강한 워크아웃 입장에 따라 회동은 성사되지 않았다.
특히 DL 측은 25년간 여천NCC를 통해 2조2000억원의 배당을 챙긴 반면 이번 1500억원 자금 지원 요청에 대해선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업계 안팎에서는 DL 측의 책임 회피를 두고 '모럴 해저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합작계약에 따라 자금 대여나 증자는 여천NCC 이사회의 승인이 필수지만 현재 이사회는 한화와 DL 측 인사가 3명씩 참여해 있는 구조다. DL이 반대하면 의결이 불가능한 셈이다. DL이 끝내 동참하지 않으면 여천NCC는 이달 말 디폴트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한화는 여천NCC 정상화를 위한 자구책도 다각도로 마련해놓고 있다. 산업은행 외화보증 재개와 자산 유동화 담보대출 등을 통해 추가 자금을 확보하고 여천NCC 공장 가동 정지를 통해 연간 약 90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또 DL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원료 다변화를 통해 원가 경쟁력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화는 이러한 현실적인 해법이 있음에도 DL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재무 문제를 넘어선 주주 간 신뢰의 문제이자 국내 석유화학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는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제기하고 있다.
반면 DL은 여전히 워크아웃을 고수하고 있다. 이해욱 회장은 여천NCC 회생 가능성을 부정하며 "내가 만든 회사지만 신뢰가 가지 않는다", "디폴트에 빠져도 돈을 투입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천NCC와의 원료공급 계약 체결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도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앞서 대산과 울산에서 롯데·HD현대, SK·대한유화 등이 권역별 구조조정에 돌입한 만큼 여수에서도 여천NCC를 롯데케미칼과 통합하는 방안이 검토됐지만 DL의 강경한 입장으로 현실화 여부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한편 여천NCC는 1999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각각 50%씩 출자해 설립한 합작법인이다. 국내 에틸렌 생산능력 3위 기업으로 업황 호조기에는 연간 1조원에 가까운 순이익을 기록했다. 그러나 2022년부터는 중국발 공급 과잉과 글로벌 수요 위축 등의 영향으로 연속적인 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여천NCC는 2022년 3477억원, 2023년 2402억원, 2024년 236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올해 3월에도 주주사 간 협의로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하지만 누적 손실 여파로 3000억원 이상이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