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빈 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사임할 때, 사진가이자 친구였던 모리츠 네어가 촬영한 말러의 사진입니다. 사진=위키피디아
1907년 빈 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사임할 때, 사진가이자 친구였던 모리츠 네어가 촬영한 말러의 사진입니다. 사진=위키피디아

지난 해 5월 KBS교향악단은 말러의 <교향곡 3번>을 연주했습니다. 이 곡은 말러의 가장 긴 교향곡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어느 도시에서도 쉽게 또 자주 연주될 수 없는 작품인데요. 단순히 교향곡의 길이가 길어서 자주 연주되지 못한다고 말씀드린 것은 아니고요.

현실적으로 다른 교향곡에 비해서 연주자들이 많이 필요한 작품이기에 자주 무대에 오르기 어려운 교향곡이라고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린이 합창단부터 성인 합창단과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가 1시간 30분 동안 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작품이거든요.

공연장에서 직접 말러의 대작을 들을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라는 생각에 필자는 KTX를 타고 서울로 향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필자뿐만 아니라 전국의 말러리안(말러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함)들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로비에 모여 가장 아름다운 말러의 교향곡을 설레는 표정으로 기다리던 모습도요. 물론 그날의 공연은 정말 좋았습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악장은 6악장으로,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는 선율이 담긴 악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올해도 말러의 <교향곡 3번>이 서울에서 연주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말러의 인기가 높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일입니다. 분명 교향곡의 한 축을 새긴 말러의 교향곡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굉장히 멋진 매력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러가 자신의 교향곡에 시도했던 여러 음악적 행동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만든 성과이기도 하고요.

가령 말러의 <천인 교향곡>은 실제로 천 명의 연주자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작품인데요. 대체 그 어떤 작곡가가 천 명의 연주자를 무대에 올릴 생각을 했을까요! 누구도 상상한 적 없는 교향악의 세계를 팽창시킨 혁신가의 모습, 오늘날까지 청중을 사로잡는 마력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어디서든 이방인의 길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1911년 5월 18일)는 현재 체코의 남부 지역인 칼리슈트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던 보헤미아에서 살던 그의 가족은 독일어를 사용하던 유대인이었는데요.

훗날 성인이 된 그는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유대인 세 가지 공간 어디에도 속한 적 없는 이방인이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해야했던 일종의 차별에 대한 아픈 기억인 동시에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고요.

그는 전형적인 음악 영재의 길을 걸었는데요. 6세에 음악 공부를 시작했고, 음악적 재능을 발견했고요. 여러모로 순탄하지 않았던 가정에서 생활하며, 15세에 빈 음악원에 입학, 음악가로의 꿈을 키웠습니다. 이후 그는 빈시립대학교에서 철학과 음악 등을 공부했는데요. 대학 재학 시절 그는 작곡가로 경력을 이어가려고 여러 노력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1881년 일종의 콩쿠르였던 '베토벤 상'에 그의 가곡 <탄식의 노래>를 출품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요하네스 브람스가 있었는데요. 말러의 작품은 고배를 마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또 다른 길을 찾았어요. 같은 작품을 당대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던 프란츠 리스트에게 보냈는데요.

만약 리스트가 좋은 평가를 한다면, 출판사에서 작품을 출판할 수 있을지 모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리스트도 그의 작품에 대해 좋은 평을 하지 않았고, 어느 출판사에서도 그 작품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를 회상하며 그는 "만약 그때 내가 베토벤 상을 탔다면, 평생 지휘봉을 잡을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한다. 모든 것을 끌어안아야 한다

-1907년 말러가 장 시벨리우스와 나눈 대화 중에서

1910년 음악가 아놀드 쇤베르크가 그린 말러의 초상화입니다. 사진=위키피디아
1910년 음악가 아놀드 쇤베르크가 그린 말러의 초상화입니다. 사진=위키피디아

큰 사랑 받았던 지휘자

말러는 대학 졸업 후, 몇 몇 작품을 쓰며 피아노 교사로도 일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는 지휘자로 활동을 시작했고요. 이 시기를 두고 그는 생계를 위해 포디엄에 올랐다고 고백했는데요. 젊은 지휘자 말러는 무척 적극적으로 포디엄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1880년의 여름 오스트리아 린츠 남부의 작은 극장에서 전문 지휘자로 오페레타를 지휘했고요. 이후 올무츠 왕립 극장, 라이프치히 오페라 극장, 프라하 국립 오페라 극장, 라이프치히 극장, 헝가리 왕립 오페라 극장, 함부르크 시립 극장,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등의 음악 감독과 지휘를 맡았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살았고요. 특히 오늘날 빈슈타츠오퍼로 부르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은 당대 최고의 지휘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는데요. 그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 10년 간 재직했는데, 이 시기는 그의 지휘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황금기입니다. 인생 후반부에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잠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지휘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청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지휘자였습니다. 그의 지휘를 본 청중들부터 동료 음악가들까지 그의 음악적 카리스마에 반한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보통 '말러리안'이라 부르는 일종의 말러 팬덤은 그가 활동하던 시기 생겨난 말입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말러리안'의 마음은 지휘자로 작곡가로 그가 만든 음악 세계가 무척 특별했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슬픈 사생활과 작곡 활동들

음악가 말러의 삶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꽤 근사한 여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사연들이 참 많은데요. 어린 시절 그의 15형제 중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났던 일, 몸이 아팠던 어머니, 먼저 세상을 떠난 첫 딸과 결혼 중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아내까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음악을 향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지휘자로 바삐 활동하는 와중에서도 총 9편의 교향곡을 포함(10번째 교향곡은 한 악장만 작곡했다), 다양한 편성의 작품을 틈틈이 작곡했거든요. 특히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큰 힌트를 얻었는데요. 교향곡에 성악을 편성한 일입니다.

또 그는 교향곡의 규모를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만들었는데요. 보통 '천인 교향곡'이라 부르는 그의 <교향곡 8번>은 실제로 천 명이 넘는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야 합니다. 역사적인 이 교향곡의 초연은 큰 화제를 모았고요. 오늘날까지 그의 교향곡들이 많이 연주되고 있지만, <교향곡 8번>은 현실적인 여건들로 인해 자주 무대에서 연주되지 못합니다.

참 심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처했던 말러는 동시대 인물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후 말러는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삶을 잘 꾸려보려는 마음을 굳게 먹었고요. 이렇게 떠난 미국 뉴욕에서 안타깝게도 그는 급성 세균성질환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다, 결국 성홍열을 진단받았습니다.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고국에서 돌아가 생을 마치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마지막 바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뉴욕에서 빈으로 돌아왔고요. 그러려고 작정이라도 했던 사람처럼 말러는 조국에 도착한 후 곧 눈을 감았습니다. 말러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새해의 두 번째 달도 어느 덧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혹시 말러를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올해 말러의 음악에 다가가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처음 만나는 말러의 음악으로 <교향곡 3번> 6악장을 들어보시기를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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