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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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에 얽힌 백 가지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네 삶이 다채로운 이야기와 함께 영글고, 결국에는 사라진다는 섭리를 빗댄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데요. 2020년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난 폴란드의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1933~2020)의 삶도 그의 음악처럼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남겼습니다. 특히 우리가 기억하면 좋을 사연도 포함해서요.

폴란드를 대표하는 현대 음악가인 펜데레츠키는 남부럽지 않게 큰 성공을 거둔 작곡가입니다. 성공한 현대 음악가였던 그는 종종 우리나라를 찾아와 관객을 만났고, 포디엄에 올라 지휘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했습니다.

지난 2019년 가을에는 서울국제음악제의 무대에 올라 자신의 작품을 지휘할 예정이었는데요. 안타깝게도 그는 연주회 며칠 전 건강상의 문제로 내한을 취소했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전의 한국 방문은 2017년인데요. 그때의 연주가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무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보통 '현대 음악'하면 떠오르는 음악들이 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세련된 조성 혹은 낯선 화음들이 안정적인 박자를 불안정하게 느끼게 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듯 어색한 음색이나 삐뚤빼뚤한 느낌이 드는 악기들의 합주 등이요.

이러한 현대 음악을 접한 청중들은 당황하기도 하고요. 바흐나 모차르트,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에 감흥을 느끼는 청중들은 이 시대에 살아 있는 음악가들의 소리가 마냥 편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펜데레츠키의 음악 어법은 우리 고유의 정서와 잘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함께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펜데레츠키는 한국을 적당히 아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는데요. 펜데레츠키는 지난 2005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진혼곡

지난 1991년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이어령(1934~2022)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는 펜데레츠키 부부를 한국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제안을 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의 광복 5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작품을 의뢰한 것인데요.

그들의 만남이 성사되기 전, 펜데레츠키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는 작품인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를 작곡했습니다. 현악기 52대가 끔찍할 만큼 괴이한 음향을 자아내는 작품인데요. 발표 직후 일본 음악계에서 큰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펜데레츠키의 작품 세계가 세상에 더 알려지기도 했고요.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펜데레츠키에게 분명 한마디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의 조국인 폴란드 또한 전쟁 범죄의 피해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나라잖아요. 그에게 일본의 전쟁 범죄로 인한 피해자가 결국 누구였는지 아느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거예요. 물론 창작은 분명 예술가의 고유한 영역이지만, 사회의 바른 가치를 쫓는 것 또한 예술가가 전해야 할 메시지이기도 하니까요.

당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어령 교수는 하나의 진실을 바로잡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교수는 일사천리로 펜데레츠키와의 만남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신은 왜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을 위한 진혼곡을 만들었습니까?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진짜 희생자는 따로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저항하다가 만주 벌판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우리나라의 의병들입니다. 누명을 쓰고 효수당한 그들이야말로 당신의 진혼곡으로 잠재워야 해요"라며 일본의 침략 전쟁의 진실을 피력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수는 다른 작곡가가 아닌 펜데레츠키에게 우리나라의 광복 50주년을 기념할 레퀴엠을 의뢰했습니다. 펜데레츠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잘 받아들였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9개월이 흘러 펜데레츠키의 다섯 번째 교향곡 '한국'이 탄생했습니다.

이 작품은 1992년 8월 14일 펜데레츠키의 지휘로 세계 초연되었고요. 이 작품은 단일 악장이지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그중 마지막 악장 격인 부분에서는 전래 민요인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선율이 등장합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종종 오케스트라 레퍼토리로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 교수의 생각이 아니었다면 아마 펜데레츠키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있었던 '광복'의 의미를 끝끝내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남대문 시장을 신나게 둘러보며 〈한국 교향곡〉의 모습을 그리던 펜데레츠키에게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던 한 사람의 음악가로, 진실을 향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그의 노력도 함께요.

참고 문헌 <알고 보면 흥미로운 클래식 잡학사전>(2023) 정은주 지음, 해더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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