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권을 시작으로 금융권에 '주4.5일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 차원을 위해 제시했던 안이 제도권 도입 논의로 번지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증권업계는 여전히 거리를 두는 분위기다. 오히려 장 거래 시간 확대 논의까지 맞물리며 업무 부담이 더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융노조, 주4.5일제 강력 요구…은행권 '제도 도입 출발점'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오는 26일 주4.5일 근무제와 임금 인상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할 예정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에는 전국 시중·국책·지방은행의 대부분이 가입돼 있다. 노조는 지난 3월 산별중앙교섭 요구안을 사측인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에 제출하고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쳤으나 주된 요구 사항인 주4.5일제와 임금 5% 인상 등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총파업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당도 은행권의 주 4.5일제 요구에 힘을 싣고 있다. 한정애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22일 "금융산업 노사가 파업이라는 극단적 대결보다는 상호 양보와 타협을 통해 자율적으로 주4.5일제 도입을 위한 대화를 진행시켜달라"며 "이재명 정부는 국정과제로 주 4.5일제 지원 시범 사업 실시와 노사 자율 확산 촉진 등을 추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주4.5일제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며 노동 시간 단축을 목표로 설정했다.
은행권은 사실상 제도 도입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 대부분의 거래가 은행 영업시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만큼 주4.5일제가 정착하려면 은행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 흐름을 금융권이 앞서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증권업계는 난색…"비현실적·업무 가중 우려"
하지만 증권업계에선 정반대 기류가 감지된다. 특히 딜을 따라 움직이는 기업금융(IB) 인력의 경우 근무 시간 단축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인수·합병(M&A), 기업공개(IPO) 등 대형 딜은 수개월에 걸쳐 일정이 촘촘히 짜여 있다. 딜이 무사히 마무리되기 전까지 변수도 다양하다.
실제로 주요 증권사 IB 부서는 '밤샘 실무'가 잦다. 현재 대형 증권사뿐만 아니라 중소형 증권사들까지 모두 전통 IB 역량 육성에 힘을 쏟고 있는 만큼 주요 사업 부문인 IB 부서에서부터 노동 시간 단축은 비현실적이라는 의견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딜은 회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주4.5일제라는 개념이 애초에 성립하기 어렵다"고 회의적인 시선을 드러냈다. 이어 "딜 진행 상황에 따라 갑작스러운 실사나 계약서 수정도 비일비재하다"며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만 업무를 진행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IB 인력뿐만 아니라 리서치 등 타 부서들도 힘들 것으로 보인다"며 "장이 열려 있지 않냐"고 의문을 내비쳤다.
임원급 인력의 부담은 더 크다. 금융당국의 책무구조도 도입 이후 내부 통제 절차가 강화되면서 각종 결재와 보고 건수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근무일 축소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오히려 업무 강도를 높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거래 시간 연장 논의 '엎친 데 덮친 격'…노동 시간 단축 흐름 역행?
여기에 거래시간 연장 논의까지 맞물리면서 증권업계 노동시간 축소는 한 발짝 더 멀어지는 분위기다. 한국거래소는 최근 글로벌 투자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거래 시간 연장을 검토 중이다. 지난 7월에는 폐장 시각을 30분~1시간 늦추는 등의 연장안 3가지를 제시하며 회원사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아직 최종안은 나오지 않았지만 증권업계 종사자들은 난색을 표하는 모습이다. 사무금융노조는 주식 거래 시간 연장 논의에 반대 기자회견까지 계획했으나 당국이 노조와 협의 의사를 보이면서 회견 일정을 취소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장이 길어지면 리서치·세일즈·운용 전 부문이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며 "특히 개인투자자 비중이 높은 한국 시장 특성상 야간 거래 수요까지 반영될 경우 인력 부담이 너무 커진다"고 말했다. 이어 "영업점 일선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PB(프라이빗뱅커)들은 업무 부담이 더 가중된다"며 "증권업계는 주4.5일제는 고사하고 근무일이 더 늘어나지는 않을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금융권을 시작으로 주4.5일제의 바람이 불고 있으나 증권업계는 구조적 한계에 묶여 있는 모양새다. 금융권 전반으로의 확산 가능성을 논하기엔 업권별 간극이 뚜렷하다는 한계가 나온다. 정부와 금융당국 차원에서 업권별 제도 도입에 보다 세밀한 지도를 그려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결국 주4.5일제가 현실화되더라도 은행을 시작으로 일부 업권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며 "장이 열려 있는 한 증권업계에는 현실적으로 정착이 힘들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이어 "물론 일괄적으로 주4.5일제를 적용하고 불가피한 부서에는 초과 근무 수당을 지급할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기업들이 그 방법을 굳이 채택할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