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기가 전장과 인공지능(AI) 서버용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제품을 중심으로 체질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다. 기존 IT 기기 위주의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고온·고압 등 고신뢰성 조건을 요구하는 산업·자동차용 시장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모습이다.
지난 14일 서울 중구 삼성전자 기자실에서 열린 삼성전기 제품학습회에서 이민곤 MLCC 개발팀 상무는 "MLCC는 이제 단순한 수동 부품이 아니라 고성능 전자기기의 전력 안정성과 신뢰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라며 "AI 서버와 전장 부문이 앞으로 MLCC 수요를 견인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장용 MLCC는 자율주행차, ADAS(첨단 운전자보조시스템) 확산과 함께 빠르게 수요가 늘고 있다. 센서·카메라·레이더 등 ADAS 구성 요소에는 수천 개의 MLCC가 사용된다. 여기에 주요 국가들이 ADAS 장착을 의무화하면서 차량 1대당 MLCC 탑재량도 증가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사 맥킨지는 2025년 전 세계 차량의 44%가 레벨2 이상 ADAS를 탑재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2030년에는 이 비율이 65%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전장용 MLCC는 양산 가능한 기업은 극히 제한적이다. 운전자 안전과 직결되는 부품인 만큼, 일반 IT 기기용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신뢰성과 내구성이 요구된다. 자율주행차 및 ADAS 기능이 고도화되면서, MLCC는 150도 이상의 고온, 2000V 이상의 고전압, 진동·습도 등 극한 환경에서도 장시간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삼성전기는 이 같은 기술 요건을 충족하는 몇 안 되는 기업으로, 2021년 ADAS용 제품을 시작으로 파워트레인·전기차·라이다용 MLCC까지 제품군을 확대해 왔다. 올해는 라이다용 MLCC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고, 부산사업장에 전장 전용 생산설비와 원재료 공장을 구축하며 핵심 소재 내재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전장과 함께 삼성전기가 공을 들이고 있는 또 하나의 분야는 AI 서버다.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순간 수백 와트 이상의 전력을 소모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전력 노이즈와 열을 안정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고용량·고내열 MLCC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삼성전기는 현재 AI 서버용 MLCC 시장에서 40%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으며, 105도 이상 고온, 100V 이상 고전압 환경에서도 작동하는 제품군을 중심으로 라인업을 확장 중이다. 최근엔 125도에서 2000시간 이상 구동 가능한 고신뢰성 제품과, 정전용량을 2배 이상 높인 GPU 전용 MLCC도 선보였다.
삼성전기는 이 같은 고부가 MLCC 경쟁력 확보를 위해 생산 거점과 소재 내재화 전략도 강화하고 있다. 부산사업장에는 전장 전용 생산설비와 원재료 공장을 구축했으며, 유전체 파우더 등 핵심 소재의 자체 조달 비중도 확대하고 있다.

회사 측은 특히 고신뢰성 제품이 요구되는 AI 서버와 전장 부문에서, MLCC의 설계 난이도와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이 상무는 "AI 서버든 자율주행차든, 연산 성능이 높아질수록 전력의 안정성과 정밀 제어가 중요해지고 있다"라며 "MLCC는 그런 수요를 정면으로 반영하는 부품이며, 특히 GPU 바로 인접한 회로에 장착돼야 하기 때문에 고용량이면서도 소형이어야 하는 기술적 요구가 까다롭다"라고 말했다.
이어 "중국 업체들이 빠르게 쫓아오고 있지만, 전장 부품은 인증에만 수년이 걸리기 때문에 격차를 쉽게 좁히긴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부가 MLCC 시장에서의 삼성전기 경쟁력이 당분간 유지될 것이란 판단이다. 현재 전장용 MLCC는 삼성전기와 해외 경쟁사가 사실상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한편 삼성전기는 올해 1분기 전장·AI 서버용 MLCC 비중 확대에 힘입어 안정적인 성장세를 나타냈다. 공시에 따르면 MLCC를 포함한 컴포넌트 부문 매출은 1조216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8% 증가했다. 기존 IT 기기용 매출이 정체된 가운데, 자동차·서버 중심의 신규 수요가 실적을 견인한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은 연구개발 및 생산능력 투자 흐름에서도 확인된다. 삼성전기는 1분기 연구개발비로 1725억원을 집행했으며, 전체 매출 대비 비중은 6.3%에 달했다. 같은 기간 컴포넌트 부문 설비투자는 957억원 규모로, 고신뢰성 제품 수요에 대응한 생산설비 확대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