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로우' 스틸컷. 사진=판씨네마

대홍수로 덮인 세상, 한 척의 작은 배가 조용히 나아간다. 배 위에는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긴장된 눈빛으로 주변을 살핀다. 인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파도와 바람 소리, 동물들의 울음소리만 들린다. 사방을 둘러보면 물에 잠긴 풍경과 청명한 하늘, 은은하게 일렁이는 빛만 보인다.

라트비아 출신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관객을 대사 없는 세계로 초대한다. 영화 '플로우'에는 인간 캐릭터도, 자막도 나타나지 않는다. 85분의 상영 시간 동안 오직 동물들의 몸짓과 표정, 울음소리, 음악, 효과음만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럼에도 이 침묵의 여정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영화 '플로우' 스틸컷. 사진=판씨네마

영화에는 꼬리를 흔들며 늘 친근함을 표현하는 골든 리트리버, 수집욕이 넘치는 여우원숭이, 어떤 동물과도 잘 어울리는 카피바라, 검은 고양이를 지키려다 무리에서 버림받은 뱀잡이수리, 호기심은 많지만 조심스러운 검은 고양이가 등장한다.

이 동물들이 우연히 만나 배를 타고 모험을 떠나는 모습은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게 하지만, 성경 속 거대한 방주와 다르게 이 작은 배는 많은 생명을 품을 만큼 크지 않다. 영화는 서로 다른 종이 예기치 않게 한데 모여 공존하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이들의 모험은 생명체가 가지는 보편적 열망을 표현한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인정받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영화 곳곳에 스며있다. 영화는 그 과정을 감상적인 말 대신, 감각으로 전한다.

영화 '어웨이' 스틸컷. 사진=씨네필운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작품에 그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을 녹여낸다. '어웨이'(2019)에서는 거대한 그림자에 쫓기면서도 꿋꿋이 여정을 이어가는 소년의 모습에 전 과정을 혼자서 도맡아 '어웨이'를 제작한 자신의 창작 여정을 투영했다.

또 '러쉬'(2010)에서는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위험을 피하다 결국 예상치 못하게 맨홀에 빠지는 사람의 모습으로 창작자의 불안을 표현했다. '인오더블'(2015)에서는 갑자기 청력을 잃는 트럼펫 연주자의 내적 갈등을 그려내며 소통의 어려움을 담았다.

'플로우'의 고양이도 그런 맥락 위에 있다. 독립적이던 고양이는 서서히 다른 동물에게 마음을 열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간다. 질발로디스 감독은 "혼자 일하다가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법을 알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플로우'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영화 '플로우' 스틸컷. 사진=판씨네마

질발로디스 감독은 대사로 설명하기보다 영상과 소리로 감정을 전하는 연출을 사용해 왔다. 또 시나리오를 구상하며 음악의 테마와 스케치도 함께 만든다. 라트비아 작곡가 리하르트 잘루페와 협업해 만든 '플로우'의 음악은 대사 없는 세계에 '또 하나의 언어'가 돼 캐릭터의 감정과 장면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플로우'는 3D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블렌더'를 활용해 제작돼 대형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처럼 화려하진 않다. 다만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와 물 위를 유영하는 카메라워크, 동물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살려낸 묘사는 감독이 의도한 대로 영화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처럼 공존의 메시지, 동물 캐릭터의 매력, 자연의 이미지, 음악의 리듬까지, 영화는 관객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체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어느 한 요소에 집중하든, '플로우'는 결국 '감각으로 경험하는 영화'로 귀결된다.

영화 '플로우' 스틸컷. 사진=판씨네마

이 영화는 '모아나2', '인사이드 아웃2'를 제치고 제97회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골든글로브에서도 같은 부문 수상작으로 이름을 올렸고, 칸영화제에서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으며, 안시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는 4관왕을 달성했다. 제작비 약 55억원의 저예산 독립 애니메이션으로 이룬 성과다.

감독은 아카데미 수상 직후 "이 수상이 전 세계 독립영화 제작자들에게 문을 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고,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해야만 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화려한 장면 없이도 강렬하며, 말 한마디 없이도 풍요로운 이야기를 담은 영화 '플로우'는 흐르는 물 위를 떠다니는 작은 배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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