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앤모델 슈퍼발레콘서트 2024 in 서울' 포스터. 사진 = 세종문화회관
'발레앤모델 슈퍼발레콘서트 2024 in 서울' 포스터. 사진 = 세종문화회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음악계에는 '신성한 단결' 촉구 운동이 벌어졌다.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에서 따온 이 표현은 침략자 독일을 내쫒기 위해 모두가 결집해야 한다는 뜻이며, 당시 프랑스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곡을 독일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 공연을 중단했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문화계 내 보이콧은 재점화됐으며 현재 진행 중이다.

12일 YTN 보도에 따르면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은 16일 공연 예정이었던 '발레앤모델 슈퍼발레콘서트 2024 in 서울; 공연 주최측으로부터 계약 이행 가처분신청을 제기받았다. 해당 공연은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소속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공연이다. 주최 측은 세종문화회관이 공연 제목과 내용, 출연진 등이 바뀌었다는 점을 이유로 대관 재심의를 요구한 것에 반발했다.

앞서 지난 3월에는 '푸틴의 발레리나'로 불리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내한 공연 '모댄스'가 취소됐다. 당시 공연이 오를 예정이었던 서울 예술의전당 홈페이지에는 "관객과 아티스트의 안전을 고려해 취소됐다"는 내용의 안내글이 게재됐다. 자하로바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합병지지 및 연방의회 의원 연임, 러시아 국가문화예술위 위원 활동 등을 펼쳤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2019년 조국 공헌 훈장을 수여받았다.

문화예술계의 러시아 예술가를 보이콧하는 움직임은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부터 지속되고 있다. 2022년 침공 직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국제축구연맹(FIFA) 등 스포츠계, 칸 영화제, 영화 제작사 '월트 디즈니' 등이 러시아를 규탄하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지난 2022년 3월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해 러시아 공연 초청을 전격 취소했다. DIMF는 2009년부터 러시아와 교류하며 15년간 9개의 러시아 뮤지컬을 국내에 소개해 왔다.

배성혁 당시 DIMF 집행위원장은 "이번 축제에 소개할 예정이었던 러시아 작품은 DIMF가 지난 2년간 공들여 준비한 작품으로 작품성, 음악성, 대중성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어 DIMF를 통해 국내에 꼭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었다"며 "조건 협의가 마무리되고 있던 상황에서 이런 일이 초래돼 집행위원장으로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전 세계가 평화를 촉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되고 있는 지금은 더 큰 명분과 대의에 뜻을 모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해외에서도 보이콧 운동은 지속됐다. 러시아 출신 세계적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같은 해 뮌헨 필하모닉과 네덜란드 대표 오케스트라인 로테르담 필하모닉으로부터 해고당했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위치한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도 지휘자를 교체했으며, 빈 필하모닉은 뉴욕 카네기홀 방문 공연 지휘자를 게르기예프에서 야닉 네제 세갱으로 바꿨다. 게르기예프는 푸틴 대통령의 강성 지지자이며, 크름반도 강제 합병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2022년 친푸틴 성향의 또 다른 러시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크림반도 합병에 찬성했었다는 이유로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진행할 예정이었던 뉴욕 카네기홀 공연에서 교체됐다. 당시 마추예프의 자리는 우리나라 피아니스트인 조성진이 이어받았다.

이처럼 러시아 예술가들의 공연 취소 및 교체가 이어지자,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 예술계 일부 인사들은 불만을 드러냈다. 푸틴 대통령은 2022년 TV를 통해 "우리의 천년 문화, 우리 국민 전체를 취소하려고 한다"며 "(서방 국가들이)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라흐마니노프를 포스터에서 삭제하고 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주한러시아대사관 역시 지난 3월 자하로바의 내한 공연 취소에 대해 논평을 통해 "대한민국에 주재하고 있는 여러 제3국 외교대표들이 러시아와의 문화교류를 중단하라는 부적절한 요구와 함께 예정된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을 폄하하기 위해 펼치는 비열한 캠페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국가와 민족 간의 상호이해와 선린 관계를 강화하는 문화예술 분야의 협력이 정치적게임의 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재차 비판했다.

예술계 내부의 '모든 러시아인을 문화적 고립시키는 것'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다. 2022년 라이문다스 말라사우스카스(Raimundas Malašauskas)는 현대예술 전문지 쿤스트크리틱(kunstkritikk)을 통해 베니스 비엔날레 러시아관 큐레이터 사직을 알리며 "많은 훌륭한 러시아 예술가들은 점점 더 억압적인 상황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자유에 전념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현재 러시아가 지휘하는 공격 및 토벌에 명백히 반대한다"면서도 "나는 러시아 사람들이 자국의 억압적인 정책과 행동 때문에 괴롭힘 당하거나 쫒겨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나는 수평적 분열이 아닌, 러시아에서 온 예술과 예술가들이 국내에서 표현할 수 없는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국제적 포럼이 있는 다단계 형태의 연대를 지지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뉴스저널리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