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7일 취임 3주년을 맞았다.
올해 7월 대법원에서 부당합병·회계부정 등 경영권 승계 관련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되며 10년 넘게 이어진 사법 리스크가 해소된 뒤, 이 회장의 행보는 한층 과감해졌다. 글로벌 고객사·공급망을 직접 챙기며 신사업·투자·기술 전략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는 올해 3분기 전사 매출이 86조원을 넘기며 분기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고, 글로벌 메모리 시장에서도 1위를 되찾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취임 기념 행사를 생략하고 현장과 글로벌 네트워크에 집중하고 있다.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및 APEC CEO 서밋 참석이 예정돼 있으며,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의 회동 가능성도 거론된다. 양측이 논의 중인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4)는 내년부터 본격 공급이 예상되는 만큼, 협력 구도가 구체화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은 지난해 R&D 35조원, 시설투자 53조6000억원을 투입하는 등 반도체·인공지능(AI)·배터리·바이오 등 미래 사업 중심으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급변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다.
재계의 시선은 이제 연말 인사로 향한다.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에서는 전영현 부회장의 유임 가능성이, DX(디바이스경험) 부문에서는 노태문 사장이 직무대행 체제를 마무리하고 정식 부문장으로 선임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번 연말 사장단 정기 인사에서는 사업지원TF를 이끄는 정현호 부회장의 거취도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정 부회장은 그룹 내 전략·조율 기능을 담당해 온 핵심 인물로, 컨트롤타워 재정비 논의와도 맞물려 거취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다만 조직 개편 폭이 커질 경우 TF의 역할과 구조가 재정의될 수 있어 자리 이동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의 등기임원 선임이 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 회장은 2019년 10월 사법 리스크가 고조되던 당시 삼성전자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뒤 비등기 체제로 경영을 이끌어왔다. 계열사별로 흩어진 전략 기능을 하나의 축으로 모아 중장기 투자·M&A·신사업 로드맵을 일괄 조율하는 컨트롤타워 재정비 가능성이 부상하는 이유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도 지난해 말 연간보고서에서 "경영 판단의 선택과 집중을 위한 컨트롤타워 재건, 내부 소통을 가로막는 장막 제거, 최고경영자의 등기임원 복귀 등 책임경영 실천을 위한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언한 바 있다.
최근 내부에서도 조직 운영 기조를 재정비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이 회장은 올해 3월 전 계열사 임원을 대상으로 진행된 '삼성다움 복원 및 가치 교육' 세미나에서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며 "사즉생의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며 기술 경쟁력 최우선 원칙을 제시했고, 국적·성별을 불문한 특급 인재 확보와 필요 시 수시 인사 가능성도 시사했다.
내부에서는 이를 기술 중심 경쟁력 복원과 조직 실행력 제고를 겨냥한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핵심 인재 확보와 보상 체계 재편
삼성전자는 올해 세계적 산업디자이너 마우로 포르치니를 최고디자인책임자(CDO·사장)로 영입하고, TSMC 출신 마거릿 한을 부사장으로 영입하며 핵심 조직 리더십을 강화했다. 기술·제품 경쟁력의 차별화를 위해 외부 핵심 인재 수혈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맞춰 보상 체계도 장기성과 중심으로 개편했다. 8월부터 임원 장기 성과인센티브(LTI)를 주식으로 지급하기로 했고, 최근에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성과 연동 주식 보상 제도를 도입했다. 단기 실적이 아닌 기업가치 성장 성과를 장기적으로 공유하는 구조로 전환하려는 조치다.
내부 조직 정비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빅딜' 추진은 확장 전략이 다시 가동되는 출발점으로 해석된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회장이 직접 주도했던 하만 인수(2017년) 이후 두번째 대형 M&A를 지속적으로 모색해 왔지만, 사법 리스크 장기화로 의사결정 속도에 제약이 있었다. 2021년 "3년 내 의미 있는 규모의 M&A를 추진하겠다"는 약속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지연된 바 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법 족쇄가 풀리면서 장기 성장축을 염두에 둔 선별적 인수·투자 전략이 구체화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마시모의 오디오 사업 부문, 독일 플랙트그룹, 미국 젤스 등을 잇달아 인수했으며, 연초에는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완전 자회사로 편입했다. 동시에 로봇 알고리즘 기업 피지컬인텔리전스, 로봇 스타트업 스킬드AI 등에 대한 지분 투자도 단행했다. 헬스케어·공조·로보틱스 등 성장 주기가 길고 미래 시장 규모가 커질 영역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포트폴리오를 재정렬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에는 거래 규모가 2조원에 달하는 플랙트그룹 인수에 대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최종 승인을 받은 뒤, 마무리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유럽 최대 냉난방공조(HVAC) 기업을 품게 되면 하만 이후 8년 만에 조 단위 M&A를 사실상 성사시키게 된다. 데이터센터 냉각 시장이 AI 초연산 경쟁의 핵심 인프라로 부상한 상황에서, 삼성은 반도체·전장에 이어 공조 솔루션까지 사업 축을 확장하며 '뉴 삼성' 성장축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평가다.
한 재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사법 리스크가 경영 판단의 속도를 늦췄다면, 이제는 이 회장이 직접 방향을 제시하고 실행을 밀어붙이는 국면에 들어섰다"며 "연말 인사와 컨트롤타워 재정비가 체질 전환의 실질적 출발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