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당국이 지지부진한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을 개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한편 근본적인 제도 개선 없이는 그간 불거져 온 실효성 지적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2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공시 결과 디폴트옵션 총적립금은 전년 대비 219% 증가한 40조원을 기록했다. 지정 가입자 수는 전년 대비 32% 늘어난 631만명가량으로 집계됐다.
디폴트옵션은 현재 41개 금융기관의 315개 상품이 정부 승인 아래 운용되고 있다.
디폴트옵션 가입자 631만명 중 85%에 해당하는 533만명이 초저위험상품에 몰렸다. 1년 수익률은 3.3%에 불과했다. 저위험상품에는 42만명이 가입했으며 1년 수익률은 7.2%였다. 중위험상품엔 33만명이, 고위험상품엔 23만명이 가입했다. 각각 1년 수익률은 11.8%, 16.8%였다.
디폴트옵션은 상품 만기가 종료돼도 가입자가 추가로 적립금 운용 방법을 변경하지 않으면 사전에 지정한 방식대로 자금을 자동으로 운용하는 제도다. 개인에게 운용 권한이 있는 DC(확정기여)형과 개인형 퇴직연금(IRP)에 적용되며 지난 2023년 7월 도입됐다.
그간 투자자들의 퇴직연금 적립금 중 90%가량이 원리금보장형 저위험상품에 머물러 있어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장기적으론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문제점이 대두됐다. 금리 인하 시 수익률이 더 떨어질 우려도 존재한다.
투자자들이 퇴직연금을 운용할 때 수익률이 높은 실적배당형 상품의 투자 위험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많은 투자자가 위험 부담을 피하고자 낮은 수익률에도 불구하고 원리금보장형에 몰렸다. 이에 정부는 투자자들이 퇴직연금 운용에서 더욱 높은 수익률을 거둘 수 있도록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제도 도입 후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성과는 지지부진하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편중된 운용 기조를 바꾸고 투자자들에게 실적배당형 상품 가입을 유도하고자 제도를 도입했지만,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포함하면서 도입이 무색해졌다는 평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디폴트옵션 전체 적립금의 88%가 여전히 초저위험상품 적립금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 89.8%와 큰 차이가 없는 수치다.
금융당국은 원리금보장상품 편중 현상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지속 추진하고 있다고 알렸다.
먼저 올해부터 개별 금융기관의 위험등급별 적립금 비중을 공개한다. 편중 정도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면서 가입자에게 적극적인 투자를 유도하고 금융기관에는 가입자 지원 서비스를 강화하는 데에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오는 4월부터 디폴트옵션의 상품 명칭도 변경한다. 금감원은 "현행 디폴트옵션 상품 명칭은 '위험'을 강조하는 형태로 합리적 투자를 저해하는 측면이 있었으나 '투자' 중심으로 명칭을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초저위험은 '안정형', 저위험은 '안정투자형', 중위험은 '중립투자형', 고위험은 '적극투자형'으로 이름을 바꾼다.
금융당국이 발표한 올해 업무계획서에서 퇴직연금 노후 소득 보장 기능 강화를 위한 디폴트옵션 제도개선, 투자일임제도 활성화 등 자본시장과 연계한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방안 검토를 언급한 만큼 당국 차원에서의 제도 개선은 꾸준히 계속될 전망이다.
한편 업계는 유의미한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선 단순한 명칭 변경 등을 넘어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초저위험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디폴트옵션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가입자의 투자 비중에서 원리금보장형 상품 가입 비율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도 따라붙는다.
다만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제한하려면 법적인 개정이 필요한 만큼 단시간 내에 급격한 제도 개선을 이루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 섞인 예측이 지배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형을 포함한 일본의 경우도 제도 실효성이 전혀 없었다"며 "당국에서도 제도의 미진한 성과를 파악했으니 더 적극적으로 개선하지 않겠냐는 기대감은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