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 죽장 입암리 사적비. 사진 제공=국가보훈처
산남의진 죽장 입암리 사적비. 사진 제공=국가보훈처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한 독립유공자 오덕홍·김일언·정래의 선생이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고 국가보훈처가 31일 밝혔다.

1907년 8월 일제가 강제한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국가 존망의 기로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한 바 있다. 전남 나주 출생(1885년)인 오덕홍 선생은 1909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부대원 20여 명과 나주 등지에서 활동했다.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위축되자, 오덕홍 선생은 일본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모집한 의병으로 소규모 유격부대를 창설해 일본군을 기습공격하고 배신자를 처단하는 등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성과를 달성했다. 그러나 9월 나주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했다.

김일언 선생(1859년생 추정)과 경북 영일 출생의 정래의 선생이 함께 참여한 산남의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측근이었던 정환직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대규모 의병봉기를 계획한 것에서 시작됐다. 1907년 봄, 제2차 산남의병 총대장에 정용기를 추대하고, 김일언 선생은 우포장에, 정래의 선생은 우익장에 임명돼 본격적으로 산남의진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김 선생은 1907년 8월 청하군 죽장면에서 일본군 척후 1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유인해 일본군 1명을 처단한 데 이어 산남의진이 청하읍을 공격해 분파소 및 부속 건물 등을 소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래의 선생은 산남의진이 해산됐으나 조성목, 정순기 등과 산남의진의 재건과 의병을 잇는 구국항일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순국한 의병을 추모하는 단체로 위장한 참동계를 조직했다. 참동계는 영천 등 영남 일대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밀정의 밀고로 발각되어 선생은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체포됐다. 일제 경찰의 자백 강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선생은 1927년 10월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오덕홍 선생에게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일언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정래의 선생에게는 2022년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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