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추정의 원칙. 확정판결이 있기 전까지 피고인 또는 피의자를 무죄로 보는 헌법 규정이자, 인권 보장을 위한 법원칙과 형사 절차상의 권리다. 형사사건 절차에서 인권과 명예를 유린당하기 쉬운 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지위를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목표하는 민주헌법의 이념에 유래한 것이라고 헌법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범죄의 혐의가 있고 1심 법원에서 혐의가 인정돼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심 중에 있는 피고인을 범죄인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범죄 혐의가 명백한 범죄자가 '증거'를 운운하며 당당하게 무죄를 주장하며 큰소리치는 것이 그 꼴인데, 하지만 "열 명의 범죄자를 잡지 못해도 한명의 억울한 피해자는 만들지 않는 것"이 무죄추정 원칙의 핵심기조다. 죄의 무죄를 추정하는 것이지 혐의까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형사법절차상에서 적용되는 원칙이므로 직장에서의 징계 또는 학교에서의 입학 취소나 퇴학 등과 같이 형사재판절차가 아닌 영역에서는 유죄 판결 전에라도 '징계처분은 가능'하다는 것이 법조계의 설명이다.

대법원은 "징계혐의 사실의 인정은 형사재판의 유죄 확정여부와 무관한 것이므로 형사재판 절차에서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기 전이라도 징계혐의 사실은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며 그와 같은 징계혐의 사실인정은 무죄추정에 관한 헌법 제26조 제4항 또는 형사소송법 제275조의 2 규정에 저촉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다. (대법원 1986.06.01 85누407) 따라서 회사, 행정청, 교육기관 등에서는 유죄 확정판결 전이라도 징계혐의가 있는 사람에 대해 자체 조사를 통해 심의를 거쳐 징계처분을 내릴 수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검찰 수사 등을 대비해 증거를 은폐한 혐의로 지난해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SK케미칼 전 임원들은 현재 SK가스 등에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하며 '최고경영자(CEO) 보좌'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에 앞서 가습기 살균제 사고 8년 만인 2019년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 출석해서 "재판 결과가 나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 나가도록 하겠다", "법 뒤에 숨거나 막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고 말하며 피해자들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가습기살균제 증거인멸 임원들은 여전히 회사 요직을 맡고 있다.

"재판은 1심 후 2심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아직 이분들의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지금 단계에서 결정할 사안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재판이 모두 끝난 후 결과에 따라 거취는 결정될 예정입니다."

가습기살균제 증거인멸 임원 중 일부가 미등기 임원으로 있는 SK가스 관계자의 설명이다. 최창원 부회장이 피해자들 앞에서 "법 뒤에 숨지 않겠다"고 했지만, 현실은 법을 방패로 이들 임원을 방어 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들 임원에 대한 징계처분은 가능했었을 텐데 말이다. 

재판이 결정되면 거취를 결정하겠다 했지만, "재판 결과에 상응한 조치, 법 뒤에 숨지 않겠다"고 피해자들에게 한 약속을 최 부회장도 지키지 않았는데, 그리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최 부회장도 이 계열사의 사장도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선도기업이 되겠다고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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