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채 앞 "목련이 피기까지는" 시비이다,(graphic by kgy)
사랑채 앞 "목련이 피기까지는" 시비이다,(graphic by kgy)

서울에서 천리 먼 길 전라남도 강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강진이 문화의 마을로 변하고 있는 것을 잘아는 사람은 없다. 문인들은 당연히 알고 있고 문학기행도 많이 가는 곳이다. 강진이 자랑으로 여기는 곳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와 영랑 시인으로 유명한 김윤식 시인, 그러니까 영랑 시인을 재조명해 본다.

황홀한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것인가. 모란이 피기까지 삼백예순날을 계속해서 울고 지내야 한다고 말하던 영랑의 시어를 음미하며 김영랑 시인을 삶을 살펴본다.  김영랑(1903-1950)의 본명은 김윤식이다. 부친 김종호(金鍾湖)와 모친 김경무(金敬武)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그의 이름이 ‘채준’이었으며 이후 ‘윤식’으로 개명했다. 아호는 영랑으로 문단활동을 위해 사용하였다.

전남 강진읍 남성리에 영랑의 생가가 있다. 1903년 1월 17일 태생으로 시인으로 데뷔하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영랑이 서울로 1948년 이사한 후에는 주인이 몇 차례 바뀌었다. 지난 1985년에 강진군이 매입하여 지방기념물 제89호로 1986년에 지정했다. 생가의 대지면적은 1340평으로 면적이 크다.

김영랑 시인이다,(graphic by kgy)
김영랑 시인이다,(graphic by kgy)

강진의 지리적 여건은 전남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 장흥군과 서쪽으로 해남군, 북쪽은 영암군과 접해있다. 1417년 태종 17년에 고려의 도강(道康), 탐진(耽津)이라는 두 현을 합하며 각기 이름의 뒤 글자를 따서 강진 康津이라고 하였다.

김영랑은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며 결혼한다. 그러나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한다. 그 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한다. 그리고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선배 홍사용·안석주·박종화과 후배 정지용·이태준 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동급생으로 화백 이승만을 통해 문학·예술적 영향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며 고향 강진에서 추진하려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이후 1920년에는 일본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에서 수학하고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에 박렬과 시인 박용철과 친분을 맺는다.

1923년 광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이후 향리에서 생활하다 1925년에 김귀련과 재혼한다. 그러면서 은거생활을 하며 지낸다. 광복 후 은거를 그만두고 사회에 적극적인 활동으로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한다. 대한독리촉성회에 참여하며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맡는다. 또 1948년에는 제헌국회의원선거에도 출마하며 낙선했다.

모란이 피기까지 - 김 영 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은거생활을 하던 1930년 시문학 6월호 2호에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를 발표한다. 이 시는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이 불행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극적으로 제한을 받을 때 돌파구를 ‘하늘’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햇발’, ‘샘물’, ‘봄길’, ‘물결’ ‘실 비단 하늘’ 등의 어휘를 쓰고 있는 것은 역석전인 표현으로 삶이 그늘져 있음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관조적이며 낭만적인 시를 읽으면 사람들은 내 유년의 추억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슬픈 추억을 떠 올리게 만드는 이러한 시는 자신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아마도 영랑은 자신도 이러한 시를 쓰게 된 것은 불안정한 삶과 불행을 느꼈다는 반증인 것이다.

당시 ‘북에는 소월, 남도에는 영랑’이라는 전국에 소문이 있었다. 그만큼 김소월과 함께 영랑 시인이 우리말의 서정적 극치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 시대에 가슴 아린 민초들에게 서정적 문체와 언어로 많은 민초를 위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강진은 서울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쇠락을 거듭했다. 그러나 최근 지자체가 활성화 되면서 새로운 문화의 메카로 발전하고 있다. 편리해진 교통이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며 문화예술의 도시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도암면 만덕리는 정약용유배지와 읍내에 있는 영랑생가로 인해 오래 전부터 문화유산답사1번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도문화일번지로 알려지며 강진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부터 불었던 문화유산답사의 영향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지며 관광이라는 문화가 발전하고 문학기행이나 각 단체의 활동으로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느끼며 사랑하게 된다. 문학가들을 중심으로 이런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장독대의 모습이다,(graphic by kgy)
장독대의 모습이다,(graphic by kgy)

산자수명한 강진은 노령산맥, 소백산맥, 백두대간의 마지막 산봉우리들이 이어져 내려오는 고장이다. 북으로 월출산, 서로는 만덕산, 동으로는 부용산이 강진을 감싸고 있다. 또한 탐진강이 은빛으로 흐르며 마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강진만은 마치 여인의 자궁 같은 모양으로 바닷물이 마을에 닿아 철썩인다.

도로를 통해 강진 나들목을 나오면 강진 읍으로 바로 진행하면 ‘영랑생가’라는 이정표가 도로가에 서서 영랑생가로 안내한다.  바닥이 벽돌인양 되어있는 자그마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넒은 뜰이 나오는 것처럼 영랑 시인의 생가가 나온다. 우측으로 시문학파기념관이 마련 되어있다.

1930년 3월 김영랑 시인과 정지용 시인 박용철 시인들이 주도하여 창간한 ‘시문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관이다. 기념관 옆 담에는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동판으로 9인의 새겨놓았다.

영랑 시인의 생가 앞에는 감성 강진의 하룻길이라는 표지판이 영랑생가에서 출발하는 문학을 돌아볼 수 있는 길을 소개하고 있다. 행랑채가 있는 생가의 대문에 들어서면 영랑시인의 대표적인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가 잘생긴 화강암에 세로 행으로 새겨져 있다.

모란은 경계의 꽃이다. 모란이 지면 이 땅에 여름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모란이 지고난지도 한참후  생가에 도착하니 남도는 복더위가 한창이다. 아름다움에 탐닉하면서도 낭만과 멋을 알았던 시인의 마을엔 여름이 더욱 싱그럽다. 구강포(강진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랑채 뒷쪽의 대숲을 흔들고 있는데 이 산만함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서고 있음을 알았다.

현실적인 지상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아끼고 보존하려고 하여도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태어난 것은 언젠가 죽음으로 이어지고 피어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스러져야 하는 것이다. 피어남과 태어남이 영원한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끝내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영랑의 이 시를 읽으면 꽃이 떨어지듯 자신도 언젠가는 꽃처럼 떨어지고 말 것을 예감하는 슬픔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시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때 다시 오는 봄 역시 오래 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봄에 희망을 거는 우리네 인간사를 노래한 이 시를 읽고 있으면 한편의 시가 떠오른다.

낙화  - 이 형 기 -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꽃이 지는 것을 인생의 죽음에 비유한 시들이 어디 이것 뿐 이겠는가.

영랑생가 문간채 옆에는 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우물 뒤로는 안채가 원형대로 복원되어 있고 방안에는 영랑시인의 초상화가 정장차림으로 앉아 있다. 부엌에는 가마솥이 걸려있고 뒤주가 놓여 있으며, 마당 한쪽의 장독대가 인상적이다. 누이가 장독을 여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영랑은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를 지었다.

벽화의 모습이다.(사진=김규용 기자)
벽화의 모습이다.(사진=김규용 기자)

일상을 바쁘게 살면서는 계절의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봄·가을이 어떻게 지나가 버리는지 알 수 없지 않던가. 영랑 시인의 누이가 장독대 감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워한다. 그 모습을 보며 시를 만들어 낸 감성이 놀랍지 않은가.

추석상도 차려야 하고, 겨울준비도 해야 하는 누이가 가을이 왔어도 기쁘지 않은 듯,  건 듯 부는 바람을 걱정하고 있다. 전라도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한 이 작품에서 영랑은 자신 고향언어를 애정으로 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김 영 랑 -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붙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사랑채에는 영랑이 집필하는 모습이 마네킹으로 만들어져 있다. 앞쪽에는 등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계절의 정취느낄 수 있다. 사랑채 뒤에 울창한 대나무 숲은 바람에 사락거리며 찾아온 길손에게 무엇인가 말문을 트려고 한다. 자연은 순결한 것이다. 이 순결은 서정적인 그리움으로 반전한다. 그리고 민족정서에 맞는 시어를 만들어 냈다.

1930년 강진에서 특별한 일없이 지내며 영랑 시인에게 광주 송정리에 살고 있던 박용철이 찾아온다. 시 전문지를 함께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여 만든 것이 “시문학”이다. 이후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 같은 해 5월에 시문학2호에 9편의 영랑이 시를  발표하게 된다.

대숲길의 모습이다.(사진=김규용 기자)
대숲길의 모습이다.(사진=김규용 기자)

1920년대의 카프의 이념 시에 익숙하던 시기였다. 독자들은 다시 향토적이고 음악성이 조화를 이룬 깔끔한 시에 대해 놀랐던 것이다. 독자들은 일약 그를 유명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3세의 이른 나이에 조혼을 한 후 23세에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렇지만 당대 최고의 발레리나 최승희와 사랑은 뭇 남성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영랑은 기질이 낭만적이어서 항상 생가 사랑채에 예술인들로 들끓었다. 특히 음악을 좋아했던 영랑 시인은 판소리와 북의 신명에 도취되었다. 당시 임방울, 이화중선과 같은 당대 최고의 소리꾼들을 불러 노래를 듣기도 했다.
이런 영랑시인은 밑바탕에는 음악을 하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영문과를 진학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30년대가 영랑시인을 가장 자신답게 살았던 시기였을 것이다. 해방 후 그는 공보처의 출판국장 직책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낙마했다, 이후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포탄 파편을 복부에 맞아 47세에 생을 마감한다. 향토색 짙고 서정적인 시 80여 편을 후세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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