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Graphic by kgy)
소련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Graphic by kgy)

진천은 예로부터 자연재해가 없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비옥한 농토를 배경으로 후덕한 인심은 생거진천(生居鎭川)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진천은 여행자들에 있어 주목적지가 되지 못했다. 여행지로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뚜렷한 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진천군의 인구수는 8만 1천여 명이 조금 안 되는 소도시이다.

그러나 최근 인구수가 꾸준히 늘어가는 도시 중 하나다. 이것은 최근 개발 분위기가 형성되며 혁신도시와 첨단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만을 본다면 대한민국의 거의 중심보다 조금 위쪽에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 서울과 불과 1시간 30분 거리로 문화적 중심지로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다.

진천은 사람들에게 농다리가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사실 진천은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탄생지이다. 또 근대의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 선생의 고향이다. 일부러 알고 찾아오지 않는 이상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곳이다.

희극 '김영일의 사'이다.
희극 '김영일의 사'이다.(사진=김대현 제공)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의 유래는 옛적에 추천석이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자가 진천과 용인에 살았다. 그러나 저승사자의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저승으로 불러간다. 그래서 돌려보내려 했지만, 이미 매장을 해 몸이없는 진천 추천석을 용인 추천석의 몸에 영혼을 넣어주며 생긴말이다. 진천의 추천석이 살아진천, 죽어용인이란 말이다. 어찌 되었던 그 만큼 좋은 곳이란 의미일 것이다.

이런 진천 출신 포석 조명희 선생은 근대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포석 조명희(1894년~1937)선생은 근대 한국사의 격랑에 휩싸이며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의 삶은 속박의 역사 속에서 격동적으로 살다갔다. 선생은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한국민족민중문학의 초석이라 부를 수 있다. 낙향한 양반의 후손. 선생은 서울로 중등교육을 받는다. 일본으로 대학 유학을 마친 후 창작활동을 하다 소련으로 망명한다. 망명하여 작품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다. 시대적 격랑의 시절을 살아간 역사의 산 증인인 것이다. 그래서 선생의 인생은 드라마적인 면이 많다.

양주 조씨의 집안으로 조선조 말에서 경술국치의 시기까지 상당한 권력과 부를 누린 가문이었다. 경술국치란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경술년(1910년) 8월 29일을 일컫는 말이며 국권피탈라고도 한다. 선생의 할아버지는 의정부좌찬성을 지냈다. 또 백부 두 분이 모두 이조판서를 지냈다. 둘째 큰아버지는 진주목사로 집안의 위세나 가세가 대단했다.

선생의 부친 조병행은 인동부사(지금의 구미)를 지냈다. 병인양요(1866년)때 진천으로 피난을 온 곳이 진천이다. 그리고 부친의 나이 70세에 선생이 모친 영일 정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런 연유로 아명이 ‘칠석’이다. 1894년은 동학혁명이 전국을 휩쓸었고 진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조명희의 시비이다.(Graphic by kgy)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조명희의 시비이다.(Graphic by kgy)

 

선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어머니 연일정씨와 맏형인 조공희였다. 어머니 정씨는 부친과 달리 농민의 딸이었다. 그런 어머니는 포석에게 부지런함과 어진 마음씨, 다정다감한 정서를 물려 주었다. 큰형인 조공희 역시 한시집까지 발표했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조공희는 나라의 비운을 안타까워하며 지리산으로 은거해 버린다.

6살 때에는 인근 서당에서 천자문을 공부하는데, 3개월 만에 천자문을 이해하고 해석했다. 이후 동문선습, 통감, 소학, 논어, 대학 등 한문 서적들도 통달해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진천 신명학교를 다니며 13세에 4살 연상인 민식과 결혼한다. 소학을 마칠 즈음 선생의 가세가 기울며 생활고에 시달린다. 가문의 몰락으로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15세 때에는 의병이 일본군에게 패한 것을 보고 벽암리 아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성장하여 강한 의병이 되자며 모은 아이들 수가 8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로 상경하여 중앙고교에 입학하지만 1914년 봄 중퇴했다.

선생은 독립을 위해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하려 한다. 그러나 평양까지 간 선생이 둘째형에게 붙들려 진천으로 돌아온다. 이후 고향에서 다양한 책을 읽으며 지낸다. 영웅전기를 주로 읽었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은 선생에게 충격을 주었다. 가난하고 보통사람에 대한 깊은 인도주의적 시각이었다.

이후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구속된다. 몇 달의 옥살이 후 독립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일본의 강력한 군사력을 넘기 위해서 동경으로 건너가 동양대학 인도철학 윤리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던 중 유학자들의 모임에서 김우진과 친분을 맺고 연극에 관심을 갖는다.

1920년 ‘김영의 사’라는 근대사 최초의 희곡을 썼다. 1921년 7월 ‘동우회’극단이 국내에서 첫 공연하며 데뷔작이 됐다. 선생이 1921년 7월에 쓴 ‘김영일의 사’는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창작 희곡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둘째는 전국순회공연이 처음이고 민족주의 신극운동을 개척했다는 의미가 있다.

또 선생은 시인으로 1924년 잡지 ‘개벽’에 5편의 신작시를 발표한다. 그리고 ‘봄 잔디밭위에’라는 시집을 같은 해 6월에 발간했다. 이로써 선생은 현대문학 초창기의 선구적 업적을 남기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생은 1925년 ‘땅 속으로’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그러나 선생의 작품은 반체제 문학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8년 러시아로 망명을 선택한다.

그러나 선생은 사랑하는 가족을 데리고 떠나오지 못했다. 일본 경찰의 압박과 감시망은 그만큼 집요했다. 식구들이 모두 사라지면 즉시 체포될 것이 자명했다. 당시 열 네 살인 중숙과 아홉 살 난 중남, 다섯 살인 장남 중락, 두 살 밖에 안 된 갓난아기 중윤이 있었다. 네 아이와 처를 두고 떠나야 선생은 아비의 마음으로 가슴이 아리도록 아팠을 것이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잠시 머물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이때 집필한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했다. 그러나 ‘붉은 깃발 아래서’는 탈고했지만 출간은 못했다. 선생의 대표작이 된 일제의 농민수탈에 저항하는 지식인 운동가의 삶을 그린 ‘낙동강’이 있다.

소설 '낙동강'을 발표한 신문기사 내용 (동아일보 1928.5 )
소설 '낙동강'을 발표한 신문기사 내용 (동아일보 1928.5 )

이후 하바로브스크로 가서 중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한다. 그러면서 조선어를 가르치며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모국의 얼을 지킬 수 있는 토대와 민족민중의 지표로 창작활동에 주력했다. 동포신문 ‘선봉’ 그리고 잡지 ‘노력자의 조국’의 편집을 담당했다. 하바로프스키 '작가의 집'에 머물며 ‘만주 빨치산’을 쓰기 시작했다. 서론만을 남겨놓고 있던 1937년 가을 어느 날, 당시 KGB 3명이 찾아와 체포된다.

실제 이유는 스탈린 정권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과 맞물려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명은 일본 스파이를 도운 협력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다. 일제를 피해 망명한 선생이 일제를 도왔을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스탈린 정부는 체포하고 1938년 4월 15일에 사형을 선고한다. 선생을 그해 5월 11일에 총살되었다.

선생은 고국인 고향에 가족을 남기고 왔다. 선생의 말이라면 하늘로 여겼던 처 민식과 4남매였다. 큰딸 중숙, 작은딸 중남, 장남 중락, 차남 중윤 나라를 등지고 소련으로 망명한 선생이다. 남은 가족들이 선생으로 인해 일제로부터 받은 고통은 불 보듯 자명했을 것이다. 그런 선생이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소련에서 얻은 가족에게 채무를 진 마음으로 타향에서 약소국 민족으로 죽어 간 것이다. 약소국 민족으로 죽어간 선생은 한없이 억울하고 슬펐을 것이다.

'낙동강' 의 그림책이다.
'낙동강' 의 그림책이다.(사진=김대현 제공)

1956년 7월 20일 극동군 관구 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판결을 파기했다. 선생의 혐의는 이때 무혐의 처리되면서 복원됐다. 선생은 러시아의 KGB에 연행되기 전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7편의 산문시, 수필, 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당시 교포문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러시아 땅에 한국문단의 씨앗이 되었다.

선생의 작품은 1988년 7.19 조치로 해금된 문학가 중 특이한 작가로 분류된다. 선생은 월북 작가도 아니며 단지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러나 카프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월북 작가로 취급되었다. 이는 한국 문단이 친일파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자신들의 친일복무에 대한 일이 밝혀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 친일문인들이 있다. 1950년대 친일 문인들은 순수문학을 문단 내에서 최상위로 끌어올린다. 그러면서 문학 담론을 만들었다. 이들의 주장은 문학에는 정치적 목소리가 들어가면 안 된다 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숨기는데 급급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카프계 작가들과 월북 작가에 대해 금서를 만들었다.

한국의 근대문학사가 해금조치 이후에 완전한 한쪽으로 만들어지며 선생의 작품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선생은 근대사 최초의 희곡작가로 활동한 업적이 조명되었다. 선생은 희곡과 시, 그리고 소설에 있어 선구자적인 업적이 확인되며 한국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적 업적을 남겼다.

진천에 조명희 문학관 동상이다.(Graphic by kgy)
진천에 조명희 문학관 동상이다.(Graphic by kgy)

1920년 희극 ‘김영일의 사’로 극으로 만들어져 한국최초 상연이 되었다는 점이다. 또 사실주의적 시인의 모습이 있다. 1924년 6월, 시집 '봄 잔디밭위에'를 출간했다. 이것은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 이학인의 '무궁화'에 이어 세 번째 시집이다. 그리고 소설에서도 ‘낙동강’이라는 대표작품으로 목적의식이 뚜렷한 프로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낙동강’은 일제에 저항하는 지식인을 그린 작품이다. 평론가들은 선생의 작품이 희극과 시, 소설 분야에 있어 매우 중요한 선각자로 평하고 있다.

재소 한인사회에서는 1956년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선생의 비극을 기리기 위해 조명희 문학 유산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타슈켄트에 ‘조명희 문학관’과 ‘조명희 거리’를 조성했다. 조명희 선생은 고려인 문학을 탄생시키며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소련 그 먼 이역에서 목 놓아 부르던 조국, 나의 딸 “조선아”, 내 아들 “조선인”  선생의 격랑의 삶에 눈시울이 적셔온다. 진천은 이리도 드라마적인 인물을 낳은 곳이다. 지금은 진천에 선생의 문학관이 설립되어 있다. 선생의 후손들이 생가 터를 찾아 표지판을 세웠다. 해금된 이후였지만, 선생이 조명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선생의 업적이 재조명되며 문학관은 물론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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