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명사의서재)

충남 보령군 대관동에서 이문구 소설가(1941-2003년)가 태어난 곳이다. 작가는 독학으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966년 ‘현대문학지’에 김동리의 추천으로 등단하며, 대표작 ‘관촌수필’과 ‘우리동네’, ‘장한몽’, ‘매월당 김시습’,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등의 소설을 남겼다.

1974년은 대한민국이 유신으로 역사가 얼어붙고 있던 시절이다. 그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며 발기인으로 창립이 되고 난 이후에는 간사로 활동하며 문학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역할을 충실히 하기도 했다. 작가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듯 보수문단 펜클럽 이사를 역임했고,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 이사와 한국소설협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특유의 토속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많은 문인들에게 언어를 사용하는데 천재적인 소질은 인정받고 있는 작가이다. 작가는 ‘토정 이지함’의 후손이다. 호는 명천(鳴川)으로 ‘울음을 우는 여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은 처참한 환경에서 자란다. 태어난 시기와 나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6.25 한국전쟁시기를 고스란히 온 몸으로 치받고 살아온 흔적이 보인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아버지가 남로당으로 활동하며 처형당했다. 큰형은 일본군의 징용으로 끌려가 실종됐다. 그리고 둘째형은 아버지를 도왔다는 이유로 생매장을 당한다. 그리고 셋째형 역시 빨갱이 집안이라는 이유로 대천 앞바다에 산채로 수장을 당했다. 그런 작가는 항상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과거 양반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할아버지(이긍직)와는 반대로 남로당 보령군 책임자로 있던 아버지(이익규)는 서로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면서 한국전쟁으로 아버지와 형들이 죽임을 당하고 할아버지와 작가만 남았다. 작가의 어린 시절 학교생활은 ‘빨갱이’집안이라는 수식어로 작가는 많이 위축된 생활을 한다.

1992년 드라마 '관촌수필'의 한장면
1992년 드라마 '관촌수필'의 한장면(자료=SBS)

지난 매체와의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러한 수식어가 저를 드러내는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공부를 잘해서도 또 너무 못해서도 안 되는 어중이떠중이가 되어야 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반공활동을 많이 하던 시절이다. 단체로 활동을 했지만 ‘머리에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대변하듯 토해낸 작품이 작가의 대표작인 ‘관촌수필’인 것이다. 작품은 8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자서전 격인 관촌수필을 써내려가며 작품을 한 ‘일락서산, 화무십일, 행운유수, 녹수청산, 공산토월, 관산추정, 여요주서, 월곡후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시작되며 1970년대까지 당시 작가가 살던 보령지역 농민들이 겪어내는 현실적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사실을 바탕을 작성된 작품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작가는 작품을 1977년 작품을 출간하며 자신의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작품에 대해 “8편의 단편 중에는 쓰면서 운 것도 있고 탈고와 함께 눈물을 지은 것도 있다. 모두가 내 이웃과 내 이야기를 기록한 까닭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끊어질 듯하며 이어지는 만연체 형식을 띄고 있다. 기사처럼 간결한 문체를 쓰고 익숙한 사람들은 읽기가 불편한 체이다. 그러나 작가의 문체는 서민적인 글체를 쓰면서 읽다보면 편안하게 읽혀지는 글체이다. 그러면서 읽다보면 최근의 문체와는 비교되는 유장한 문체를 다루는 것 자체가 누구나 할 수 없는 문체라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작품은 거침없이 호탕하면서도 섬세한 표현은 현실감을 높이고 있다. 지역 토속의 언어를 바탕으로 익살스럽기도 하며 구수한 표현은 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작품은 작가가 겪은 고향에서의 아픈 추억과 기억을 더듬고 서울로 상경하며 실화를 배경으로 집필했다. 작품은 한국전쟁을 통해 한민족의 비극과 처참하게 망가진 작가의 가족사에 대해 진솔하게 그려 작가의 삶과 처참한 한국역사를 엿볼 수 있다.

1992년 드라마 '관촌수필'의 한장면
1992년 드라마 '관촌수필'의 한장면(자료=SBS)

이문구 작가는 삶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팔순을 넘긴 할아버지와 자신만을 남겨 놓고 1953년 가족을 송두리째 앗아간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당시 13살의 어린 소년이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과 마음의 상처는 작가가 생을 마감하기까지 씻을 수 없는 작가의 고통으로 남았다. 이러한 충격에 작가는 이후 다짐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 어린마음에도 작가의 다짐은 “나는 절대 형무소나 유치장 출입은 하지 않겠다.”였다. 그러면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과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살았다는 것.

작가의 당시 마을도 여느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이에 대한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의 서로 죽이며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고아가 되다시피 한 작가는 1959년 19세의 나이로 서울로 올라와 막노동과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작가는 당시 자신의 삶을 소설로 써야하는 작가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고 한다.

독학을 통해 서라벌예대에 응시를 하며 당시 면접관 김동리를 만난다. 이것이 작가와 김동리의 인연이 된다. 당시 작가의 독특한 문장은 김동리 소설가의 눈에 들었다. 그러며 작가를 ‘을류 장학생’으로 선발하게 된다. 당시 소설가들에게 잘 볼 수 없었던 서민의 언어와 민중들이 살아 숨 쉬는 듯 하는 언어가 김동리의 눈에 든 것이다. 

이는 작가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어린 시절을 막노동판과 시장에서 익혔던 언어들인 것이다. 작가는 생활고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작가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빨갱이’라는 수식어였다. 자신의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빨갱이’라는 수식어는 작가를 우익의 그늘로 밀어 넣었다.

작가는 자신의 유령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익보수 문인의 총수의 그늘에서 그를 추종하며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한다. 이러한 사실 속에는 두 가지가 작용을 하게 되는데, 첫째는 생존이다. 두 번째는 유교적 ‘결초보은’의 끈이었다. 앞서 밝혔듯이 작가의 집안은 ‘토정 이지함’의 후손이다. 이런 작가는 유교적인 전통적 스승에 대한 유대감이 있었다. 작가는 김동리를 결국 대립하지만, 그 대립 속에서도 끝까지 아버지처럼 섬기는 모습을 보인다.

작가는 김동리의 추천으로 등단을 함은 물론 ‘월간문학’과 ‘한국문학’의 문예지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이런 작가와의 끈은 이후 진보와 보수가 문단에서 논쟁을 치열하게 벌일 때도 작가는 김동리를 비판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승 김동리는 보수의 대표 작가이며, 제자는 진보 문학의 선봉 작가였던 것. 그러나 이러한 극과 극을 달리는 문학적 이념적 싸움 속에서도 사제지간의 정이 변치 않았다고 한다.

관촌수필 기념비 (graphic by KGY)
관촌수필 기념비 (graphic by KGY)

1988년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서울에서 국제펜클럽대회가 열리며 민족문학 작가회의와 김동리가 각을 세우며 서로 날선 검처럼 대립했다. 이때 작가는 스승을 적으로 둘 수 없다며 작가회의에서 탈퇴했다. 이후 작가는 김동리와 사제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동리가 1995년 세상을 떠나자, 김동리기념사회업를 만들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업회 회장을 맡아 보았다. 그리고 작가는 이후 2000년에는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이사장을 취임한다.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이사장을 지내던 작가는 문인들을 특유의 포용력을 바탕으로 문인들을 영입하고 작가회의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그리고 이문구 작가가 동시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작가가 ‘산 넘어 저쪽’이라는 동시를 통해 현실의 고단함을 짐작케 하며 그 산을 넘으면 낙원이 있다는 듯 그려지는 동시를 통해 작가의 삶의 역정을 짐작할 수 있다. 

산 너머 저쪽엔 / 별똥이 많겠지 / 밤마다 서너 개씩 / 떨어졌으니. / 산 너머 저쪽엔 / 바다가 있겠지 / 여름내 은하수가 / 흘러갔으니.

1988년 작가는 ‘개구쟁이 산복이’라는 동시 112편이 담긴 동시집을 출간했다. 작품의 제목에 산복이는 작가의 아들 이름을 차용하여 쓴 것이다. 동시집에 작품으로 수록된 ‘산 넘어 저쪽’은 작가의 유년시절에 비롯된 가족사를 기억하며 평화를 갈구했던 작가의 마음이라 짐작된다. 평생을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했던 작가의 행복의 유토피아가 저쪽에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1992년 ‘매월당 김시습’이라는 베스트셀러가 탄생하며 처음 자기 방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후에도 이후 작가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1998년 작가의 소득을 보면 월평균 118만원이었던 것을 보면 작가의 삶이 그리 평탄치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작가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아갔다.

 

작가의 평생 지론은 “작가는 말을 발견에서 작품이 시작 된다.”는 것과 “작가는 서재에 있어야 한다.”였다. 그러면서 작가는 항상 언어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특히 민중의 삶에서 우러나는 말을 바탕으로 말을 찾는 작업에 열중했다. 그로인해 작가는 특유의 언어를 바탕으로 작품을 한 것으로 국내 문단에 새로운 업적을 남기고 있다.

이문구 소설가에 대해 유종호 문학평론가가 “농촌 최후의 시인”이라며 소설가를 시인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이문구 작가의 작품이 시인들이 봐도 놀라운 문체로 작품이 쓰였음을 반증하고 있다. “문체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이 담긴 농촌언어로 살아 숨 쉬고 작가의 푸른 문체는 능수버들처럼 늘어지며 농무처럼 휘감기고 있다.”고 표현했다.  

작가의 일생에 한국전쟁은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한 슬픔과 응어리를 통한 삶의 흔적이 문학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작가의 강렬한 삶의 의지를 대변해 주고 있다. 민중의 삶의 바닥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 작가의 문학과 언어 속에는 슬픔을 넘어서고 있다. 작가만의 유토피아의 꿈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작가는 평생을 욕심없이 살다 2003년 위암으로 사망한다. 마지막 유고 작품이 된 동시집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는 동시 66편을 묶어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출판도 되기 전 작가는 원고를 넘기고 10만에 고단한 현실의 삶을 놓았다.

작가는 “내가 죽으면 고향마을 뒷산 소나무 숲에 유골을 뿌려 달라. 내 이름으로 어떤 문학상이나 문학비를 만들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선생의 유언대로 작가의 문학비와 문학상을 만들지 않았다. 다만 작가가 생존할 당시 1995년에 ‘관촌마을 기념비’가 동네입구에 세워져 있어 문학비를 대신하고 있다.

또한, 최근 다양한 매체가 등장하며 이문구 작가의 '관촌수필'이 오디오북으로도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작품으로 소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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