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graphic by kgy)
마당에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graphic by kgy)

문학이 없는 민족은 뿌리없는 나무와 같다. 그리고 말라 죽는 나무처럼 민족도 사라진다.  초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여행은 사람을 즐겁게 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좋은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 목적을 정하고 떠나는 여행도 즐거운 일정을 만들고 배움을 갖는 것도 좋을 듯하다. 특히 문학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문학기행도 좋을 것 같다. 문득 떠오르는 작가 김유정 시인은 어떤가.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은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실레마을에서 8남매 중 막내다. 아버지 김춘식(1873~1917)은 당시 향리에서 참봉이었다. 어머니는 청송 심씨(1870~1915)이며 춘천이 고향이다. 김유정은 청풍 김씨 24세손으로 그의 고조 김기순이 실레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

당시 막내의 특징이 부모들이 유년시절에 세상을 떠나는데 김유정도 마찬가지였다. 8살 때 어머님이 10살이 되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천석지기였던 그의 집안이 낭비가 심한 장남으로 가난뱅이 신세가 되었다. 가난과 함께 부모을 일찍 여윈 탓에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문학관의 정자이다.(graphic by kgy)
문학관의 정자이다.(graphic by kgy)

형 김유근을 따라 서울로 이사 오며 12세 때인 1920년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9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한다. 그 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늑막염을 앓았다. 작가는 방랑벽이 있었던 것일까 1930년 전국 각지를 방랑하며 여행을 한다. 그리고 1931년 고향으로 돌아와 금병의숙을 세우며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역마살은 그를 고향에 두지 않았다.

작가가 휘문고보 4학년 때 명창 박록주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연애편지를 끊임없이 보내며 구애를 했다. 그의 청년시절 짝사랑이 지독했다고 한다. 당대의 명창이던 송만갑에게 사사한 박록주(1905~1979)는 작가에 비해 3살이나 연상이었다. 그리고 이미 전국적인 명창 반열에 올라있는 박록주가 어린 작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애를 했다.

강촌역 부근이다.(graphic by kgy)
강촌역 부근이다.(graphic by kgy)

작가는 아마도 사랑의 연정, 질투로 인해 가슴은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처는 실레마을의 산과 들을 다니며 작품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맘이 박록주를 병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사랑이 승화하여 문학적 바탕으로 변하고 작품을 통해 고통을 잊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은 29세의 나이에 요절했고 그의 작품이 가난과 부, 병마와 절망, 이러한 파란만장한 삶의 역사가 명작을 집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김유정의 생가는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있다. 작가는 한때 노다지를 꿈꾸며 금광개발에 나서기도 했다.

1933년 서울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하며 문학작품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그러던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또 동시에 ‘노다지’가 중외일보(中外日報)에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한다. 작가는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다, 작가 이상을 만나 절친한 친구로 지내기도 했다. 당시 폐결핵을 앓던 작가는 2년여의 짧은 생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기며 지병으로 인해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유정 작가가 집필한 소설31편에는 특징적으로 한자가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시절 농촌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희극적이며 해학미를 강조해 쓰는 방식이었다. 웃음과 해학을 통해 힘들고 비참한 현실적인 문제를 분노나 눈물로 하는 것을 자제하여 상처에 대해 적응력과 힘을 기르며 미래를 예비하는 방안이었다.

작가의 작품은 주로 농촌을 배경으로 집필되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노다지를 찾는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을 그린 “금 따는 콩밭”과 머슴 데릴사위와 장인이 벌이는 갈등을 희극적이며 유머스럽게 표현한 “봄봄” 등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두드러진다.

대한민국에 1899년 경인선의 개통된 후 처음으로 역명(驛名)이 사람이름으로 개명한 역이 있다. 바로 김유정역이다.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역은 문학의 순수성을 바탕으로 2004년 12월 1일부터 신남역이 김유정역으로 개명된 것이다.   

작가의 고향마을과 생가를 찾아보는 것은 문학적 영감을 얻기도 하고, 춘천이라는 호반의 도시를 찾아 자연과 문화, 역사의 흔적이 어우러진 곳을 찾는 여행은 어떨까하는 조심스레 제안을 해 본다.

작가 김유정은 1936년 조광(朝光)지 5월호에 자신의 고향을 서술하는 글을 게재한 것이 있다. 아래는 게재 글의 일부이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에서 한 이십여리 가량을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 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움푹한 떡시루 같다 하야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춘천(春川)’ 봄과 강. 이름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호반의 도시답게 봄의 냇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춘천은 아름다운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더욱 아름다고 역사적인 향기를 뿜고 있는 이유는 소설가 김유정이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춘천을 배경으로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썼고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윤대녕의 소설 ‘소는 여관으로 들어 온다 가끔’이 있다. 이 이 소설은 청평사, 소양호를 비롯한 춘천주변의 안개를 잘 묘사하기도 했다.

김유정의 문학과 삶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해야 한다. ‘김유정역’에서 약 200M 떨어진 위치에 김유정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생가를 통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실제 지명 등을 살펴 볼 수 있다. 김유정 작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석지기의 아버지를 두었고, 가난뱅이로 고향에 돌아와 소작하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이때 쓴 소설들이 1930년대의 농촌실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 병마와 가난. 작가의 마지마 모습이었으리라. 그러나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말을 한층 탁월하게 해 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생가복원에는 조카 김영수씨와 금병의숙의 제자들에 의해 고증되었다. 초가집이지만 크고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복원된 생가 옆에 김유정기념관을 지어 작가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학적부며 호적부 등이 작가가 생존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등장인물과 배경이 거의 생가와 인접한 마을과 자연배경을 작품에 그대로 담았다. 한국 문단사에 이런 경우가 거의 없어 특이한 경우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를 이해해야 김유정 시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춘천이 상고시대에는 맥국(貊國)도읍지라 한다. 그러나 정보가 문헌에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서기 737년 신라 시대 선덕여왕이 군주로 두고 통치시킨 우수주(牛首州)라 하였다는 문헌이 있다. 명칭이 고려 때는 광해주(光海州)로 변경된다. 1413년 조선 3대 태종 때에야 비로소 춘천이란 이름으로 사용되게 된다.

남이섬 숲길이다.(graphic by kgy)
남이섬 숲길이다.(graphic by kgy)

그리고 1887년 고종이 한양이 위태로울 때를 대비한 이궁(離宮)을 현 강원도청 자리에 짓는다. 1894년 원주에 있던 감영(監營)을 춘천으로 옮기며 관찰사로 개칭한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된 후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또 6.25때는 도시가 폭격을 맞으며 폐허가 되었다. 이후 소양강댐과 춘천댐이 완공되면서 아름다운 인공호수를 삼면에 가진 호반의 도시가 되었다. 

현재 인구가 조금씩 늘어 28만 명이 조금 넘는 도시로 관광과 지식산업의 메카로 발전하였다. 특히 경전철이 서울에서부터 춘천까지 놓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관광의 메카가 되었다. 북한강 중류에 위치하고 있어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분지형태로 지형이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의암호를 거쳐 화천가는 국도는 그 풍광이 실로 놀랍도록 아름답다.

춘천은 지리적으로 아름다운 탓에 축제가 많아지며 관광객을 더욱 많이 유치하고 있다. 국제마임축제, 인형극제, 애니타운 페스티벌, 막국수 축제, 국제 연극제등은 춘천이 축제로 만들며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중이다.

소양호의 선착장에서 배로 10분 정도면 도착하는 오봉산 계곡에서 청평사를 오르다보면 만날 수 있는 구성폭포가 있다. 구성폭포가 쏟아내는 소리는 마음의 응어리마저 풀어주는 듯 떨어지는 물소리가 시름을 잊게 한다. 고려정원영지를 지나 청평사는 영헌선사가 고려 광종 24년(871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춘천이 한때 드라마 겨울연가로 인해 일본여인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던 장소이다. 그로 인해 춘천시내 명동에는 먹거리 닭갈비와 막국수가 명물인 춘천이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한류문화의 신호탄이었을까 지금은 전 세계 어디나 한류의 열풍이 불고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겨울연가의 주인공 배용준과 최지우는 일본에서는 거의 신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 한류열풍으로 문화관광부 정동채 장관과 배우 최지우가 함께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그는 한국의 문화관광부장관과는 의례적인 악수만 나누고 최지우를 보자 정신을 못 차리고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남이섬에 대해서만 물었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였다. “겨울연가의 무대 남이섬에 꼭 가보고 싶습니다.. 전나무숲의 그 벤치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습니까?” 남이섬의 주인이 (주)남이섬이라는 회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14만평의 섬에는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의 장소가 되고 있다.

‘겨울연가’가 일본을 강타하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남이섬에 가기 위해 가평역에 내렸다. 또 2004년도에 일본 TV에서 방연 된 겨울연가로 인해 일본에서 온 여성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실 남이섬은 남이장군이 잠들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초선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이다. 남이장군은 무과에 급제하며 이시애의 난(1467년.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공로를 인정받아 26세에 병조판서에 오른다. 그렇게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이 화근으로 작용해 예종 때 역모로 처형된다.

그가 묻힌 곳이 바로 남이섬인 것이다. 지금은 그 풍관의 아름다움과 육지의 섬인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데이트 장소로 유명하게 된 것이다.

50대 이후의 세대들은 춘천을 호반의 도시라 불렀다. 대학생활 MT로 가장 많이 가던 곳이 바로 강촌역이다. 지금은 많이 쇠퇴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낭만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 시절을 그리워 한번쯤 돌아보고 추억에 젖곤 하는 곳이다. 통기타를 둘러메고 다니던 시절에 청춘들은 강촌에서 젊음을 불사르고는 했다.

당시 경춘선은 완행열차였다. 주말에는 초만원을 이뤘다. 단선으로 운행되던 경춘선은 급행이 없었다. 그래서 단 하나의 간이역이라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마석역을 출발하는 열차가 아름다운 풍광을 스치며 대성리역에 도착한다. 북한강이 보이며 거슬러 올라가는 기차는 ‘강촌역’에 많은 청춘들을 쏟아내며 다시 떠나가곤 했다. 강촌역 앞에 북한강에 가설되어 있던 강촌다리를 삼삼오오 건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젊은 시절의 추억이 되던 경춘가도는 유흥의 거리로 변하고 초라했던 간이역은 러브호텔에 가려 추억을 회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오로지 북한강이다. 북한강은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다. 철원과 화천의 골짜기를 돌아 춘천댐과 의암댐에 거쳐 북한강으로 흐르는 물은 세월을 무시로 지나치지 않는다.

강촌역사 다리.(graphic by kgy)
강촌역사 다리.(graphic by kgy)

경춘가도는 이제 빈틈없이 유흥가로 변모하고 있다. 초라한 간이역은 화려한 유럽의 성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러브호텔과 건물들에 가려 그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북한강이다.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철원군 일부와 화천의 골짜기들을 굽이 돌아 춘천댐과 의암호수를 지나서 북한강이 침묵으로 흐를 뿐이다. 

김유정 작가의 생각에서 멀지않은 곳에 북한강 흐르고 높고 넉넉했던 금병산은 작가의 문학적인 상상력을 잉태하게 한 곳이다. 작가의 생전당시 그곳에 있었던 광산과 서울에서 온 배들이 실레마을 근처에 정박하며 사람들이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문학 작가가 없다면 도시는 삭막할 것이다. 춘천이란 도시는 김유정 작가로 인해 자연이 아름다운 풍광과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도시가 되었다. 그는 고향마을의 지명을 소설에 넣고 토속어를 소설로 녹여내어 우리 민중들이 쓰던 언어가 살아있게 되었다. 산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서울로 학교를 다니며 경험한 것이 소중한 고향의 가치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허구를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소설에서도 지명과 토착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의 금병산자락은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이 산의 아랫마을이 실레마을이다. 그의 생가가 잘 복원되어 정원과 단아한 정자가 있다. 연못으로 비친 햇살이 부서지며 눈을 어지럽힌다. 생가는 고증을 거쳐 완성된 집이다. 기념관 가까운 곳에는 단편소설 ‘봄봄’에 나오는 봉필영감의 집터는 팔작지붕의 개량형 기와집으로 깔끔하게 단장해서 누군가가 살고 있다.

소설 ‘봄봄’에서 배참봉댁 마름으로 등장한 인물 김봉필은 욕필이로 알려진 실존인물이라 한다. 욕필이는 욕을 잘해 이 마을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유정이 주막에서 술 마시고 금병산을 넘어 김봉필의 집을 기웃 거리다가 이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가난했던 1930년대 농촌에 데릴사위를 통해 노동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농민들의 실상이다. 또 일상의 언어들이 가져오는 순박함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김유정 소설의 특징은 아리랑이 많다. 소설에 직접 작사한 아리랑을 지어 삽입하는 것이다.  아래는 소설 ‘만무방’에서 웅칠이가 소작이 서럽고 가난한 삶에 대한 신세타령을 아리랑 가사로 삽입하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중기차는 가지고 왼고등 트는데
정든님 품안고 낙누낙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낼갈지 모래갈지 내모르는데
옥씨기 강낭이는 심어뭐하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소설 ‘아내’에 삽입된 아리랑 가사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춘천아 봉의산아 잘있거라
신연강 배타면 하직이라

봉의산은 춘천의 산이고 신연강은 지금의 의암호 부근이다. 이렇게 고유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며 아리랑 가사를 작사해 소설에 삽입했다. 이런 점들로 볼 때 그가 고향과 민중에게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증명되고 있다

김유정 작가를 이 지역 사람들은 많은 사랑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1968년 어려운 시기에 ‘김유정문인비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춘천 칠송동 부근 경춘 구도로 의암호 변에 문학 비를 세웠다. 그리고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김유정의 밤을 개최하는 등 선양사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철도역을 김유정역으로 바꾸는 일도 해낸 것이다.

러시아에 사람이름을 가진 역이 있다. 바로 톨스토이역이다. 1910년 10월28이 가족들 몰래 가출해 무조건 기차를 탔다. 그런 톨스토이가 라잔 우랄 철도의 작은 간이역 아스타보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유언 “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 역 이름이 ‘톨스토이역’이 되었다

또 영국의 에딘베러시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스콧의 소설 명인 ‘웨이벌리’역이 있다. 작가 스콧(1771~1832)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말년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는 스콧에게 영국 정부는 군함을 내 주었다.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인들이 가지는 문학에 대한 사랑이 보인다.

작가가 단짝 친구였던 소설가 안회남(1909년~?)은 휘문고보 친구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은 많은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슬픈 글이다.

 “닭과 뱀을 사먹고 병석에서 일어나고 싶다”.

당시 돈 백원을 마련하기 위해 안회남과 상의하기 위해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한줌 재로 변한 작가는 한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문학적 가치는 자신의 고향 실레마을을 넘어 춘천과 대한민국의 문학계에 별이 되었다. 현실의 삶이 힘들어지고 고단해 질 때 춘천으로 길을 떠나 추억도 되새기며, 김유정 시인의 삶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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