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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작가를 찾아서...오장환 시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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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작가를 찾아서...오장환 시인편
  • 김규용 기자
  • 승인 2019.08.28 2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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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시인 생가 그래픽 by kgy
오장환 시인 생가 그래픽 by kgy

오장환(1918~ 1951)시인은 충북 보은군 회인읍(현 회북면 중앙리)출생이다. 오 시인의 아버지는 천석지기 부자였다. 그러나 오 시인이 어렵게 살게 된 배경은 서자였기 때문이다. 오 시인은 안성보통학교를 거쳐 휘문 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정지용선생의 제자였다. 휘문 중학교에서 정지용 시인과 사제지간으로 인연 맺었다. 훗날 정지용 시인이 납북, 월북하였다는 설왕설래로 인연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다. 두 사람은 고향도 지근거리인 옥천이라 더욱 그러했을 터.

시인 오장환은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후 1937년부터 1947년까지 ‘성벽’, ‘헌사’, ‘병든 서울’ 등 4권의 시집을 발표하였다. 이는 그가 시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집착이 있지 않았다면 당시 궁벽한 삶에서 쉽지 않은 일 이었다.

오장환 시인의 제1집‘성벽’,과 제2집 ‘헌사’는 삶의 비애와 퇴행적인 소산물이 많다는 것이 일반적이 서평이다. 제3집 ‘나사는 곳’은, 서정적이며 해방 후 발행된 ‘병든 서울’은 사회 계급적 이념이 많고 사상적인 내용이 바탕이 되어 작성된 시가 많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시인은 미당 서정주와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해방 전에 활동하면서 둘이 한때는 절친한 친구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정주가 친일 활동으로 돌아서며 둘은 사이가 멀어졌다. 또 자오선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친화력과 활발한 성격으로 선이 굵은 미남 시인이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활동을 하다 1946년 월북한다. 

오장환 시인이 이육사 시인에게 보냈다는 엽서
오장환 시인이 이육사 시인에게 보냈다는 엽서(사진=육사기념관)

 

또 오장환 시인은 지병인 신장결핵을 고치기 위해 1974년 구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당시 쓴 시를 1950년 5월에 ‘붉은기’라는 시집을 내며 5번째 시집을 발간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 이 시집을 가지고 서울에 왔었다는 검증되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또 오래 전 고서연구회모임을 통해 인사동에 위치한 고서점 통관문 주인 이겸로 옹이 시인의 부인에게 구입한 ‘청구영언’이 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구입하였지만 이겸로 옹은 오장환 시인이 통일이 되어 내려온다면 다시 돌려주겠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렇지만 오장환 시인의 생사가 불분명하여 다시 돌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오 시인은 1951년 신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는 설과 남로당 숙청 사건이 발생한 1953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확실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사망하였을 것이기에... 오 시인이 살아있다면 102세가 되어 사실상 살아있다고 믿는 이는 없다.

‘청구영언’ 조선 영조 때 김천택이 엮었고 국보급으로 취급되는 책이다. 우리나라의 시조 1천여 수와 가사 7편이 수록되어 있다고 전한다. 오장환 시인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월북하며 부인이 시인을 그리며 책을 안고 우는 것이 안타까워 친정아버지가 책을 팔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통관문 주인은 오장환 시인이 다시 온다면 돌려주겠다는 얘기는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책과인생’을 발행하는 범우사가 오 시인의 발표되지 못한 장시 ‘황무지’를 발굴해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문학평론가 임헌영 교수가 “원고지에 또박또박 쓴 장시 ‘황무지’는 얼마 전 발굴 된 장시 ‘전쟁’과 글씨체가 같아 오 시인이 등단전후의 습작으로 보인다.”고 밝히며 ‘전쟁’이 몇몇 행은 지워지며 당시 검열을 통과해 발표가 되었지만,  ‘황무지’는 제목이 불순해 검열조차 안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요즘은 누구나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면 사람이 살다가 떠나버린 빈집이 늘어가는 것을 보며, 아쉬운 마음이 가슴에 저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도시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인 것처럼 생각도 든다. 아련한 추억이 깃든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듯 말이다. 오 시인의 생가 터를 지금은 기념하기 위해 복원을 해 놓아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문학관을 만들어 그의 삶과 시세계에 대한 것을 접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 놓았다. 시인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놓아두어 찾아오는 사람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우리는 세상의 삶에 힘들고 지치면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유년시절 뛰어놀던 동네와 그리운 친구와의 추억을 생각하면 이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지난 시절은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오장환 시인의 문학관과 생가 터를 방문해 보면 오 시인의 지난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이 떠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와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해방 후 이념의 갈등을 겪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던 오 시인이 월북하며 행적이 사라진 이. 이를 찾아 가는 길은 많은 생각이 교차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충북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 그의 고향마을. 

오 시인이 갈구하던 이념과 삶이 이제는 생가 터를 남기고 사위어가는 것. 작품만이 작가의 삶을 투영한다. 인생의 뒤안길로 멀어진 사람. 우리 역시 누구나 이렇게 후세에 남겨질 것이다.

오 시인은 미남형의 얼굴이다. 빛바랜 흑백사진. 작가의 젊은 시절 사진이 생가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 작가는 사진으로 오는 사람을 대하며 자신의 삶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월북 작가이기에 겪는 일이다. 과거 이곳을 찾는 작가들이나 시인들이 수상한 사람으로 몰리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전해진다. 이제는 물론 오장환문학제라는 지역의 축제로 자리를 잡아 더 이상 다른 시선을 느낄 수는 없다.

1996년부터 오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념하는 문학제가 시인의 생일 5월 15일을 기념하여 열리다가 지금은 10월로 옮겨 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문화제에서는 오장환 문학상도 시상을 하며 요즘 '친일문인기념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오장환 문학상은 시련을 겪고 있다. 보은군과 솔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오장환문학상이 친일파로 밝혀진 미당 서정주를 기리는 '친일문인기념상'을 받은 수상자들이 심사위원과 상을 수상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는 것이다. 

고향앞에서 -오장환-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 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린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 지운다.

간간히 잔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하면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이 시는 시인이 얼마나 고향으로 오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는 시로 ‘고향 앞에서’이다. 어린 시인이 고향을 떠나 피반령을 넘어서 가며 자신의 고향으로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절망감이었음이다. 시인은 떠돌이 장꾼들에게라도 고향 소식을 전해 듣고자 했던 절절한 고향의 그리움. 고향집으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시인의 마음이 잘 녹아든 시이다.

그의 고향마을을 찾는 과정에 이 시를 다시 보며 시인이 얼마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다. 
충남 보은은 속리산이 있다. 속리산은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소백산맥을 지나 자리 잡은 명산이다. 이 맘 때가 되면 여름 뜨거운 태양과 타협해 만든 익어가는 곡식과 과일들이 풍성한 소출을 자랑하듯 저마다 흐드러지게 열린다. 풍성함으로 인해 옛 시인이 살았을 고달픈 삶에 오버랩 되지 않는 것은 묘한 느낌이다. 당시 우리나라가 무에 그리 풍성했겠냐마는. 지금은 옛 시절이 가고 없는 것처럼 시인도 가고 작품만 남아있다. 많은 문인들은 오 시인을 생각하면 쓸쓸히 불어오는 늦가을 낙엽이 스러지는 고독감이 몰려온다고들 말한다. 아마도 그의 힘겨운 삶에 대한 고독이 이입이 된 듯하다.

과거에는 시인의 고향을 가려면 청주인터체인지를 나와 보은으로 가는 25번 국도를 거쳤다. 노령과 소백산맥을 어어 주는 피반령 고개 너머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보은의 인구가 점점 줄어 현재는 3만 3천여 명이다. 산줄기를 따라 골짜기마다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있고, 인심 좋은 주민들이 길손을 반기곤 한다. 소백산맥이 휘돌아 치듯 내려가는 모양의 동쪽과 산맥너머에 위치한 상주가 접해있다. 그리고 서쪽과 북쪽으로 청원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옥천군이 인접해 있다.

지금은 보은에서도 문학제를 열며 시인의 기리고 있다. 과거 피반령 고개를 넘어가야 했던 것이 지금은 청주와 상주를 잇는 당진·영덕고속도로가 생겨 지명도 회인면으로 변경 되었다. 회인 인터체인지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오 시인의 생가는 예전 어느 농부가 살다 떠나며 폐가로 남아있다 최근 시인의 생가 터를 재정비하고 문학관을 만들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안쪽으로 감싸 안은 마을이 바로 오장환 시인의 시 ‘산협의 노래’가 연상되는 시인의 고향 보은군 회인면 마을이다

좁은 골목길을 약 150M쯤 들어서면 오장환문학관이 위치해 있다. 앞에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찾는 사람들이 편하게 만들어놓고 있다.  과거 생가는 쓰레트 지붕에 가난이 꺼멓게 묻어 있었던 흔적은 사라지고 보은군에서 정비를 하여 새집이 되었다. 문학관 앞으로 화단을 만들어 놓아 갖가지 꽃들이 피어있다.

생가와 주변 골목길을 걷기도 하며 생각했다. 과거 오장환 시인도 유년시절 이 길을 걸었으리라. 그리고 그때는 지금의생가가 자기의 업적을 기리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산협(山峽)의 노래 -오장환-

이 추운 겨울 이리떼는 어디로 몰려다니랴.
첩첩이 눈 쌓인 골짜기에
재목을 싣고 가는 화물차에 철로가 있고
언덕 위 파수막에는
눈 어둔 역원이 저녁마다 램프의 심지를 갈고.

포근히 눈은 날리어
포근히 눈은 내리고 쌓이어
날마다 침울해지는 수림의 어둠속에서
이리떼를 근심하는 나의 고적은 어디로 가랴

눈보라 휘날리는 벌판에
통나무 장작불 벌겋게 지피나
아 일찍이 지난날의 사랑만은 따스하지 아니하도다.

배낭에는 한 줌의 보리 이삭
쓸쓸한 마음만이 오로지 추억의 이슬을 받아 마시나
눈부시게 훤한 산등을 내려다보며
홀로이 돌아올 날의 기꺼움을 몸가졌노라

눈 속에 싸인 골짜기
사람 모를 바위틈에 맑은  샘이 솟아나고
아늑한 응달녘에 눈을 헤치면
그 속에 고요히 잠자는 토끼와 병든 사슴이.

한겨울 내린 눈은
높은 벌에 쌓여
나의 꿈이여! 온 산으로 벋어 나가고
어디쯤 나직한 개울 밑으로
훈훈한 동이가 하나
온 겨울, 아니 온 사철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따스한 사랑.

한동안 그리움 속에
고운 흙 한 줌
내 마음에는 보리이삭이 솟아났노라

가난하고 외로운 산속마을의 겨울나기를 따스한 사람으로 표현한 작가의 마음을 읽는다.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따스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가. 오장환시인은 일제말기에 붓을 꺽지 않으면서도 친일하지 않은 작가다. 이런 이면에는 겨울 뒤에는 반드시 봄이 오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의 역사성과 사상성이 묻어 있는 작품들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간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그의 대표시 <병든 서울>에 집약되어 있다. 해방정국의 감동과 감격을 나타내면서 한편으로 울분과 분노의 선동적인 리듬감을 가지고 있는 이 시를 읽다보면 해방전후사를 인식하게 한다.

오장환문학관에 들어서면 전시실 앞으로 시 ‘나 사는곳’이 나무현판에 시와 작가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 앞으로 밀랍인형으로 오장환 시인의 젊은 모습을 재현해 놓고 양 옆으로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만든 친절함이다.

나 사는 곳 - 오장환

밤늦게 들려오는 기적 소리가
산 짐승의 울음소리로 들릴 제
고향에도 가지 않고
거리에 떠도는 몸은 얼마나 외로울 건가.

​여관방의 심지를 돋구고
생각 없이 쉬고 있으면
단칸방 구차한 살림의 벗은
찬술을 들고 와 미안한 얼굴로 잔을 권한다.

​가벼운 술기운을 누르고
떠들고 싶은 마음조차 억제하면
조용조용 잔을 노늘 새
어느덧 눈물방울은 옷깃에 구르지 아니하는가.
"내일을 또 떠나겠는가"
벗은 말없이 손을 잡을 때
아 내 발길 대일 곳 아무 데도 없으나
아 내 장담할 아무런 힘은 없으나
언제나 서로 합하는 젊은 보람에
홀로 서는 나의 길은 미더웁고 든든하여라.

시인은 이렇게 고향을 그리워하며 활동을 한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믿음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시린 가슴은 어쩌지 못했으리라.

오장환 시인의 연대와 활동사항 등을 볼 수 있다. 오장환 시인의 작품이 실렸던 책들이 소개되고 있다.

또, 보은은 명산 속리산으로도 유명하다.. 속리산(俗離山)을 보면서 언뜻 생각해 보면 경치에 반해 속세를 떠난다는 뜻일까 그래서 이러한 한자를 쓰고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기실 이러한 이름은 784년(신라 선덕여왕 5년)에 고승 진표(眞表)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깨달음을 얻어 하물며 짐승도 저러한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수도하였다. 여기에서 '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승 진표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고한다. 어린나이 11세 때 사냥을 나가며 밭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두었다. 그런데 다음 해 봄 개구리가 꿰미에 꿰어진 채 그때까지 살아 우는 것을 보고 참회와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법주사는 속리산에 위치한 신라 553년(진흥왕 14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말티재(800M)를 넘어 가야 만날 수 있는 법주사로 가는 길에 정이품송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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