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書院)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세운 성리학 교육기관이다. 우리 교육·사상·문화의 뿌리를 살필 수 있어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전국에는 670여 개의 서원이 남아있는데, 이 중 9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받은 서원들을 걸어본다.

조선의 성리학 교육과 사회적 확산을 주도한 서원은 요즘으로 치면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대부분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에 건립됐다. 서원은 교육·연구뿐만 아니라 사회 교화와 지방 사림 세력의 거점 역할도 했다.
서원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제향 공간' △시를 짓고 토론을 벌이며 교류하는 '유식 공간'이다. '유식'은 자연 속에서 수양하고 휴식하는 걸 말한다. 선비들은 유식을 배움의 과정으로 여겼다. 그래서 지형과 자연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서원을 지었다.
유네스코(UNESCO)는 한국의 서원 중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이상 건립 순)을 지난 201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사림 주도로 설립한 첫 서원
경상남도 함양에 위치한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 7년) 개암 강익과 지역 유학자들이 일두(一蠹) 정여창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남계서원 서북쪽 함양 개평리에서 태어난 정여창(1450~1504년)은 세자 시절 연산군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2달에 걸쳐 함양으로 옮겨져 남계서원 뒤 승안산에 안장됐다. 정여창은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한국의 뛰어난 유학자 다섯 명을 일컫는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성균관 문묘에 모셔졌다.
남계서원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이자, 지역 사림이 주도해 설립한 첫 서원이다. 개암 강익과 함양 유림들은 곡식을 내어 건립을 위한 여론을 환기했고, 함양군수 서구연이 물자와 인력을 지원했다. 도중에 서 군수가 부친상을 당해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이후 부임한 군수의 지원으로 1559년에 강당을 완성했다. 1561년엔 모든 시설을 갖추고 정여창의 위패를 봉안했다. 초대 원장은 39세였던 강익이 맡았다. 1566년(명종 21년) 왕이 '蘫溪書院(남계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경남 의병 활동 구심점… 왜군 급습에 화재로 소실
남계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보다 9년 뒤에 건립됐다. 특히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이 처음 등장한 곳이다.
경사지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남계서원 앞으로는 들판과 강이 있다. 정문인 '풍영루'를 지나면 좌우에 작은 연못이 있다. 이어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 '양정재'와 서재(西齋) '보인재'가 자리한다. 양정재·보인재보다 한 단 높은 곳에 강당인 '명성당'이 있고, 그 뒤 경사지에 사당이 있다. 남계서원은 경사를 활용해 강당을 앞에, 사당을 뒤에 배치하는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 형식을 처음 도입했다. 또한 정문에서 사당까지 중요한 건물을 거의 좌우대칭으로 뒀다. 이후 건립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 형식을 따랐다.

서원의 편액이 '남계(蘫溪)'와 '서원(書院)'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특색이다. '남계'는 서원 앞을 흐르는 하천 이름이다. 물이 풍부한 땅에 서원이 입지했음을 알 수 있는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경남 지역의 의병 활동을 주도한 남계서원은 5년 뒤 정유재란(1597년) 때 함양을 급습한 왜군에 의해 불탔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3년(선조 36년) 인근 나촌으로 옮겨졌다가, 1612년(광해군 4년)에 옛터인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남계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다. 경남에서는 유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