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書院)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세운 성리학 교육기관이다. 우리 교육·사상·문화의 뿌리를 살필 수 있어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전국에는 670여 개의 서원이 남아있는데, 이 중 9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받은 서원들을 걸어본다.

스승과 제자가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서원의 중심 건물 '전교당'에 걸린 편액. '陶山書院(도산서원)'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사진=신승헌 기자
스승과 제자가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서원의 중심 건물 '전교당'에 걸린 편액. '陶山書院(도산서원)'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사진=신승헌 기자

 

한국의 서원은 조선의 성리학(중국 송나라 때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파) 교육과 사회적 확산을 주도한 곳이다. 요즘으로 치면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대부분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에 걸쳐 건립됐다. 서원은 교육·연구뿐만 아니라 사회 교화와 지방 사림 세력(선비들)이 모이는 핵심 거점 역할도 했다. 

서원의 공간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 있는 '제향 공간'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벌이며 휴식하고 교류하는 '유식 공간'이다. '유식'은 자연 속에서 수양하고 휴식하는 걸 말한다. 선비들은 이를 성리학을 배우는 과정의 하나로 여겼다. 그래서 지형과 자연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서원을 지었다.

유네스코(UNESCO)는 한국의 서원 중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이상 건립 순)을 지난 201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도산서원 앞뜰에 있는 '왕버들'.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던 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다. 퇴계 이황은 한시 '도산잡영'에서 시냇가의 왕버들을 바라보며 풍류 넘치는 버드나무와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했다. 사진=신승헌 기자
도산서원 앞뜰에 있는 '왕버들'.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던 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다. 퇴계 이황은 한시 '도산잡영'에서 시냇가의 왕버들을 바라보며 풍류 넘치는 버드나무와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했다. 사진=신승헌 기자

 


학문과 학파 중심 서원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년)이 세상을 떠나고 4년 후인 선조 7년(1574년)에 문인과 유림이 건립하기 시작했다. 1575년 공사가 마무리되자 선조 임금으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1576년에는 퇴계의 위패가 봉안됐다.

도산서원의 기반은 '도산서당'이다. 이황은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명종 16년(1561년)에 도산서당을 세웠다. 그리고 도산서당에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도산서당에서 퇴계 이황이 거처하던 방은 '완락재', 마루는 '암서헌'이라 부른다. 도산서당 바로 옆에는 퇴계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던 기숙사 '농운정사'가 있다. 이황은 제자들이 공부(工夫)에 열중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농운정사를 공(工)자 모양으로 지었다고 한다. 

(왼쪽부터) 도산서당에서 퇴계 이황이 거처하던 방 '완락재'와 마루 '암서헌'. 사진=신승헌 기자
(왼쪽부터) 도산서당에서 퇴계 이황이 거처하던 방 '완락재'와 마루 '암서헌'. 사진=신승헌 기자

 

퇴계 사후 도산서당 뒤편으로 전교당, 박약재(동재)·홍의재(서재), 상덕사, 전사청, 장판각 등이 건립되면서 도산서원이 완성됐다. '전교당'은 도산서원의 강당으로, 한석봉이 쓴 편액이 걸려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건물이다. '상덕사'는 퇴계와 그의 제자인 월천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전사청'은 상덕사에서 향사를 지낼 때 제수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도산서원은 조선 사회와 정치에 많은 영향을 많이 미쳤다. 특히, '학문과 학파 중심 서원'의 모델이 됐다. 도산서원에 보존된 '강회록'에는 성리학에 관한 토론을 통해 학파의 통일된 의견을 도출한 강학 활동의 흔적이 있다.


퇴계 이황의 학덕을 흠모한 정조대왕 


도산서원의 주향 인물인 퇴계 이황은 연산군 7년(1501년)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23세에 성균관에서 공부했고, 24세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수차례 낙방 끝에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다. 대제학은 학문·경연을 총괄하는 최고 관직이다. 선조 3년(1570년)에 세상을 떠난 후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시사단. 정조 임금이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열었던 곳이다. 사진=신승헌 기자
시사단. 정조 임금이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열었던 곳이다. 사진=신승헌 기자

 

그런데 퇴계 이황의 어머니는 그의 뜻이 높고 깨끗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고 일찍이 '너의 벼슬은 한 고을 현감직이 마땅하니 높은 관리가 되지 마라.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아니할까 두렵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황은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한 것으로 전해진다. 학문 연구, 후진양성에 힘쓴 이황은 조선의 교육과 사상에 있어 큰 줄기를 만들어냈다. '계몽전의',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주자서절요', '심경후론', '예안향약', '자성록' 등 주요 저서도 남겼다.

이런 퇴계를 흠모한 정조대왕은 1792년(정조 16년) 어명을 내려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었다. 도산서원 앞에 자리한 '시사단'이 '도산별과'를 보던 장소다. 당시 7228명이 응시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선발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도산서원에서는 도산별과를 재연하는 전국 한시백일장 '도산별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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