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디다스 운동화가 사라진 건 전학 첫날이었다. 기준(이재준)은 농어촌 특별전형을 위해 어머니(고서희) 손에 이끌려 지방에 한 초등학교로 전학 왔다. 낯선 동네, 낯선 학교. 기준에게 이 동네는 그저 불편할 따름이다.
더구나 어머니와 함께 담임 교사와 상담받는 사이 신발장에 둔 운동화는 도난당했다. 복도 CCTV는 고장 난 상태고, 본 사람도 없다. 무언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는 불편한 공기로 천천히 공간을 채운다.
지난 9일 개봉한 장병기 감독의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은 이 사건에서 출발해 아이들이 마주하는 여름의 감정과 세계를 그린다. 기준은 영문(최현진)·영준(최우록) 형제를 중심으로 동네 아이들과 섞인다.
아이들 세계에는 말없이 정해진 서열과 기류가 있다. 보호자 없이 살아가는 형제 중 영문은 그 세계 안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다. 기준은 영문과 어울리며 그를 동경하고, 때로는 따라 하며 서서히 그 세계에 스며든다.

"그 시기에는 아무리 원하지 않아도 힘의 게임 안에서 서열이 매겨지잖아요. 예를 들어 축구할 때 팀을 짜다가 빠르게 뽑히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죠. 어느 순간 그 무리 안의 권력에 내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나는 신경 안 쓸래, 공부만 할 거야'라고 해도, 결국 1년이든 2년이든 휘말리게 되죠."
지난 3일 서울 동작구 영화 투자·배급사 엣나인필름 사무실에서 만난 장 감독은 '여름이 지나가면'에 어린 시절 이해하지 못했던 힘의 논리가 자연스레 작동하는 아이들의 세계를 담았다. 그가 다룬 세계에는 힘을 향한 막연한 동경과 이해받지 못하는 '상식의 세계'의 차이가 녹아 있었다.
"내가 가진 상식이 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명절에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결혼, 집, 차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상대방은 가벼운 농담일 수도 있지만, 엄청 기분 나쁠 때가 있죠. 거기서 '상식이 다른 두 세계는 아주 다르구나'를 느꼈어요."
"그런 경험으로 영문이가 어린 시절 왜 화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여러 상황을 토대로 설정을 만들어보니 화내는 영문이가 제 마음 안에서 해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영문이라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어요."

장 감독에게 상식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아는 지식을 넘어 각자의 세계를 살아가는 기준에 가까웠다. 마을의 문제아로 비치는 영문 역시 감정 표현이나 관계 맺기의 상식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인물이다. 장 감독은 형제애나 청결 같은 개념 자체마저 영문에게는 아예 다를 수 있다고 봤다.
"형제간 우애도 어떻게 보면 부모가 가르치는 거잖아요. 부모가 말하는 '동생이랑 싸우지 마', '너 형한테 그렇게 구는 거 아니야' 등이 수년간 학습돼 있지 않으면 이 형제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형제애랑은 조금은 다른 모습이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영문·영준 형제에게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축구였다. 장 감독은 이들에게 축구란 편을 가르거나 감정을 따지는 것과 무관한 놀이로 봤다. 다만 그 축구마저 포기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영문이는 이미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영준이는 아직 몰랐어요. 영화 끝에 영준이가 '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라고 말하며 처음 몸으로 느끼게 돼요. 영문은 자기가 겪었던 걸 동생도 이제 알게 됐구나 싶은 거예요."
"그래서 축구는 원래 미워하고 좋아하는 거 없이 그냥 축구였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걸 알고 축구마저 재미없어지는 거예요. 축구는 유일하게 사회와 연결된 끈이었는데, 그것마저 놓아버린 거죠. 그들이 축구하지 않는다는 건 저한테는 더 음지로 가거나 더 큰 비행으로 빠지는 거예요."
이런 영문·영준 형제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에는 동정이 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방관에 가깝다. 기준의 어머니도 처음에는 동정으로 형제를 대하지만, 점차 이들이 기준과 가까워질수록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기준의 어머니는 장 감독에게 "상식의 차이가 가장 잘 드러나는 인물"이었다.
"기준이 엄마는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불쌍한 아이를 돕고 싶고, 그런 마음을 자식에게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죠. 그런데 막상 기준이가 형제에게 휩쓸려 다닐 때는 당연히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고 싶어 해요. 자식이 그런 상황이 되면 저도 그렇게 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영화에 등장하는 어른을 조금의 위선도 있고 적절히 나쁜 면도 있지만, 이를 쉽게 나쁘다고 단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싶었어요."

장 감독은 '여름이 지나가면'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되길 바랐다. 도시와 시골, 어른과 아이를 정형화해 보지 않으면서 어느 편도 들지 않으려 했다.
"결말에서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어떤 방향으로 제시하는 건 정말 부담스러워요. 저는 제 이야기 안에서 어느 편도 안 들려고 노력했어요. 도시에서 왔다고 그들이 옳다고 말하지도 않고, 시골이 순수하다고 말하지도 않으려고 했어요. 또 어른들을 나쁘다고만 말하지도 않고, 아이들을 순수하기만 하다고 말하지 않으려고 했죠. 그런 균형을 고민하며 그냥 질문하고 싶었어요."
이런 거리두기는 영화의 음악에서도 확인됐다. '여름이 지나가면'에는 영준이가 플레이스테이션을 켜는 장면의 게임 소리를 제외하면 배경음악이 없다. 이는 그가 '맥북이면 다 되지요'(2017)부터 '할머니의 외출'(2019), '미스터 장'(2021)을 거쳐오며 일관되게 유지해 온 연출 방식이다.
"음악을 떠올리지 않고 시나리오를 쓴 다음 음악을 입히면 어색하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음악이 많은 영화도 아니었어요. 시나리오 단계에서 음악을 생각하지 않고 쓰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번 작품뿐 아니라 전작들에서도 특정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게 하는 연출은 피했어요. 전작들도 이야기를 조금은 관조적이면서 냉정하게 보거나, 때로는 냉소적으로 조소하듯이 보는 경우도 있었고요. 한 인물의 감정에 깊이 들어가는 연출은 제 이야기와 맞지 않다고 느꼈거든요. 누가 옳은지 편드는 방식은 제 이야기에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장 감독은 '여름이 지나가면'을 가급적 사전 정보 없이 보길 바랐다.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많은 생각을 심어주는 영화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 보고 나면 할 말이 많아지던지 오히려 말하기 곤란해지는, 생각할 점이 많은 영화라고 믿어요. 생각하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면 다른 정보 없이 봐주시길 바랍니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장 감독이 네 번째로 만든 영화이자 첫 번째 장편 영화다. 그는 2017년 '맥북이면 다 되지요'로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 대상을 받았고, 2019년에는 치매 노모를 둔 한부모 가족의 이야기를 흑백으로 담은 '할머니의 외출'을, 2021년에는 농촌 마을의 권력과 욕망을 다룬 '미스터 장'을 선보였다.
최근 앨리스 먼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과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을 즐겨 읽었다는 그의 차기작 주제는 '사랑'이다.
"이번에는 남녀 관계가 주가 되는 사랑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요. 다만 멜로는 아니고, 감정적으로만 접근하지 않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