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부터 2012년까지 하스미 시게히코가 영화에 대한 쓴 글이 실려 있는 선집 영화의 맨살(박창학 역, 2015)은 발간 당시에 적지 않은 화제를 모았고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하스미 ‘입문서’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하스미 시게히코는 누구인가? 현대 일본 비평에 대한 좌담회(현대 일본의 비평, 송태욱 역)에서 포스트구조주의, 소비사회 혹은 이념이나 이상 등 공동체를 지탱하는 내용이나 의미가 상실된 분기이자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데뷔에 직간접적인 계기가 된 ’1968년‘의 계기를 68혁명이나 오일쇼크와 같은 현실 정치에서 찾고 있을 때 홀로 심드렁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그가 일본의 문학·영화 평론가인 하스미 시게히코다. 그에게 68혁명이나 오일쇼크 같은 현실 정치의 사안은 중요한 게 아닌 듯하다. 하스미에게 ’68년 5월‘은 그것을 예감케 한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의 등장의 충격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고, 오일쇼크가 일어난 1973년은 영화감독 존 포드가 사망한 것으로 더 기억되어야 하는 해였던 것이다.

한편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걸쳐 일본문학사에는 ’내향의 세대‘라 불리는 일군의 작가와 비평가들이 등장했다. 이념의 붕괴로 타자나 사회 비판에 대한 논거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하스미는 친밀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철저하게 일본 사회의 기저에 흐르고  있던 상징성을 거절했고, 이를 통해 비로소 ’의미‘가 아니라 표층에 있는 ’언어‘ 혹은 ’기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스미에게 중요한 것은 심층이 아니라 표층이다. 가령, 하스미에 의하면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존 포드, 1962)에서 존 웨인은 제임스 스튜어트가 상징하는 문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이프런 차림으로 권총을 쥐는 남자의 이미지를, 그 순간에 영원화하려고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 된다. 표층의 기호는 하스미에게 사고(事故)처럼 다가온 것들이다. 하스미 스스로도 고백하기를 그의 “영화비평의 원점”은 “(연출자에 의해-인용자) 중심화 되어 있지 않은 것을 화면에서 보아버린 그 충격을 (…) 상호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스미의 목표는 영화 작품을 정합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다. 하스미에게 중요한 건 이해 가능한 범주에서의 상대적 차이가 아니라, 상대적 차이로 해소할 수 없는 한계에 가까운 절대적 차이를 전달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하스미는 영화에서 사고처럼 나타난 ’보아버린‘ 기호에 달라붙어 그 충격을 더듬는 일로 비평을 실천한다.

물론 하스미에 대한 비판도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가령, 화면에 ’보이는 것‘으로만 비평하기를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하스미 역시 종종 화면 바깥의 잡사(雜事)를 동원하는 자가당착을 기꺼이 저지른다(이걸 아이러니라고 해도 좋을까).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를 든다고 해도 하스미의 글이 선사하는 강렬한 ’독서체험‘ 앞에서는 역시 무력하다고 생각된다. 하스미의 문체가 위의 비판을 ’유머‘로 소화하는 틈새까지 갖고 있고, ’보아버린 충격‘을 전달하는 데 비평의 계기를 찾고 있는 그에게 있어 이러한 비판에 대해 굳이 괘념할 필요도 딱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충격‘에 차근차근 접근하기 위해서는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 할리우드의 50년대」, 「리얼타임 비평을 권함」,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 이 사치스러운 B급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등 책의 후반부에 실린 강연이나 담화 등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금동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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