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사진=연합뉴스

오직 내일의 사랑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드뷔시가 남긴 음악은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의 눈물이 고여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프랑스의 대표 작곡가이자 인상주의 음악을 이끈 클로드 아실 드뷔시(Claude-Achille Debussy, 1862~1918)는 수많은 여인들을 사랑했고, 그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가 쓴 연애편지들은 하나같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을 강렬하게 사랑해요’라고요. 그러나 ‘내일은 다른 여자를 사랑할 거예요. 그것이 내 사랑의 방식이거든요’라는 마지막 문장을 빼먹은 채로요.

이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사랑도 변하고요. 그러나 드뷔시의 사랑처럼, 변덕이 죽 끓듯 한 사랑도 흔치 않을 거예요. 그는 평생 그 누구에게도 박수 받지 못한 사랑에 빠져 지냈는데요. 물론 두 사람이 함께한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나온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요.

그러나 그 대단한 사랑이 시대의 이념과 가치를 거스르면서 또 누군가가 삶을 마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요. 무엇보다 끔찍한 그 사랑에 지친 소중한 친구들마저 떠나갔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분명 드뷔시는 사랑 앞에서 '나쁜 남자'였습니다.

프랑스의 작은 모차르트

13살의 드뷔시는 데뷔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그의 부모, 특히 아버지가 드뷔시에게 거는 기대가 컸는데요.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처럼, 프랑스의 작은 모차르트로 아들이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길 바랐거든요. 다행히 드뷔시는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고, 또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가난한 형편에서 그가 피아노를 배우고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모테 드 플레르빌덕분이었는데요. 모테 부인은 프레데리크 쇼팽의 공식 제자 명단에는 없지만, 비공식적으로 몇 차례 쇼팽에게 레슨을 받은 적이 있어요.

모테 부인은 우연한 기회에 어린 드뷔시를 만나 그의 음악적 소질을 발굴한 최초의 음악 교사입니다. 이후 모테 부인의 지도로 드뷔시는 파리국립음악원에 입학했어요. 작곡 부문에서 로마 대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최고의 음악학도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열 여덟의 순정

1880년 파리국립음악원에 재학하고 있던 열여덟의 드뷔시는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모로 생티의 성악 수업 반주자로 참석했다가 운명적인 첫사랑 마리 블랑셰 바스니에를 만났는데요. 당시 32살이던 마리 블랑셰는 프랑스에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활동하고 있었지요. 붉은 머리칼과 초록빛 눈동자가 매력적이었습니다.

18살 청년이 32살의 여인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거예요. 드뷔시는 마리에게 감히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마리의 남편이 드뷔시를 후원하며 자연스레 그들이 만날 기회가 잦아졌지요. 이렇게 7년 동안 드뷔시는 마리를 사랑했고 마리를 위해 27편의 가곡을 작곡했어요. 마리는 드뷔시의 뮤즈로 사랑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영감을 강렬하게 주는 대상이었던 거죠. 드뷔시는 로마 대상의 부상으로 주어진 로마 유학길에 오를 때에도 후원자에게 받은 여행 경비를 탈탈 털어 마리를 위해 꽃다발을 샀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드뷔시는 로마 대상 수상자들의 숙소였던 빌라 메디치의 어느 한적한 곳에서 1885년 6월 아름다운 연상의 여인 루이즈 오숑과 키스하는 장면을 들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더 발전하지 않았고요. 로마에서 돌아온 이후, 드뷔시는 불가능한 첫사랑 대신 현실의 첫사랑을 만납니다. 이렇게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던 루이즈와의 관계는 자연스레 정리되었습니다.

동거인 감추기

드뷔시의 첫 번째 연인은 가브리엘 듀퐁(Gabrielle Dupont, 1866~1945)입니다. 둘은 몽마르트의 카바레에서 처음 만났고 급속도로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자연스레 그들은 1892년 3월부터 파리의 롱드르길 42번지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대략 1890년에서 1898년까지 깊은 관계를 유지했는데요. 지금도 그들이 살았던 건물이 남아 있어요.

드뷔시의 인생 중 가장 평화로워 보이는 시기는 이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별다른 사건이 없었거든요. 물론 종종 드뷔시가 다른 여자를 만났고, 가브리엘 모르게 약혼을 한 일도 있었지만요. 모든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꽤 오래 지속되었어요. 헤어지고 싶어도 못 헤어졌거나 그만큼 둘 사이가 단단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상하게도 드뷔시는 가브리엘과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연주회나 친구들의 모임 등에는 늘 혼자 참석했어요. 그들이 한 집에 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드뷔시는 동거인을 감추기 급급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보면, 가브리엘 입장에서는 드뷔시의 공식 연인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서운했을 수도 있는데요. 드뷔시의 친한 친구였던 폴 뒤카스는 드뷔시에게 심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독한 이기주의자라는 편지를 남깁니다. 동거인의 존재를 숨겼던 드뷔시의 마음이 어딘지 모르게 얄밉기도 합니다. 어쨌든 둘은 그렇게 둘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하루 만에 파경을 맞은 첫 약혼

1894년의 어느 날 드뷔시는 소프라노 테레제 로제에게 청혼했습니다. 가브리엘과 동거하고 있었는데도요. 드뷔시는 가브리엘 몰래 바람을 피우다가 결국 테레제 로제와 결혼하기로 결심을 했던 거예요. 소프라노 테레제 로제는 가브리엘 포레의 제자였는데요. 1892년 2월 17일 드뷔시와 테레제 로제는 한 무대에 올라 연주회를 열었어요.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친구로 우정을 쌓다가 결국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파리에서 드뷔시와 가브리엘이 함께 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어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 테레제 로제뿐이었고요. 그들의 약혼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테레제 로제를 걱정하던 사람들은 드뷔시의 동거를 알렸어요. 결혼 전 다른 사람과 동거할 수 있지만 그것을 숨긴 채 자신을 만나온 드뷔시를 용서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거든요. 둘은 약혼 직후 파혼했습니다.

당시 드뷔시의 행동은 파리 음악계 인사들 사이에서 큰 비난을 받았어요. 가브리엘과 테레제 로제를 속인 드뷔시의 부도덕한 행동뿐만 아니라 추가로 그의 빚과 사치에 대한 이야기까지 수면 위로 올라왔고요. 이때의 충격으로 평소 드뷔시를 좋아했던 친구와 지지자들은 하나 둘 그를 떠나갔습니다. 드뷔시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잃었지만 가브리엘은 다시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또다시 드뷔시가 다른 여자들을 찾아가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요.

핑크빛 페티코트와 사랑을

그러나 드뷔시는 1899년 10월 파리에서 패션모델로 활동했던 마리 로잘리 텍시에와 결혼합니다. 드뷔시는 첫 번째 아내를 릴리라고 불렀어요. 당시 드뷔시의 결혼 서약 증인으로 에릭 사티가 나섰고요. 드뷔시는 릴리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러나 릴리는 그렇지 않았어요. 드뷔시와 결혼할 마음도 없었고요. 드뷔시의 구애에도 릴리는 별 반응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드뷔시의 첫 번째 동거인이었던 가브리엘과 친구 사이였거든요.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쉽게 드뷔시에게 마음을 허락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또한 늘 바람피우는 남자를 남편으로 만나고 싶은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드뷔시는 한 가지 묘책을 꾸몄어요. 릴리에게 자신과 결혼해주지 않으면 곧 자살할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했거든요. 마음이 약했던 릴리는 이렇게 드뷔시의 첫 번째 아내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5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드뷔시의 결혼에 충격을 받은 가브리엘이 자살을 시도한 사건도 있었지만, 이후에도 새로운 로맨스에 집착했던 드뷔시가 카페와 바 또는 카바레를 드나들며 여자들을 만났거든요. 그러다 결정적으로 드뷔시가 두 번째 아내를 만난 후 둘의 관계는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드뷔시가 만났던 여자 중에는 조각가 카미유 로잘리 클로델도 있었는데요. 클로델이 드뷔시의 얼굴을 모티프로 '왈츠'를 조각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실제로 클로델은 '왈츠'의 한 작품을 드뷔시에게 선물했는데 드뷔시는 그 작품을 죽을 때까지 벽난로 위에 두고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릴리는 남편 드뷔시의 씀씀이가 헤프다는 소문을 냈어요. 돈을 버는 족족 드뷔시는 동양의 예술 작품을 수집하거나 책을 구입하며 돈을 다 써버렸다고요. 또 드뷔시가 자신을 집안일 하는 사람으로 여겼고 어항 속 금붕어처럼 조용하길 바랐다고요. 드뷔시는 자신만의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는 릴리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영원한 아내

1904년 7월 릴리는 드뷔시의 권유로 친정이 있는 빌르뇌브-라-귀야르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파리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상당히 먼 곳으로 아내를 보낸 것인데요. 이 틈을 타 드뷔시는 엠마 바르닥과 밀회를 시작했습니다. 엠마 바르닥은 드뷔시가 가르치던 제자의 어머니였는데요. 드뷔시 입장에서는 학부형이었던 셈이죠. 엠마는 가수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어요. 아마 음악이라는 주제를 통해 드뷔시와 대화도 잘 통했을 테지만, 무엇보다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로 서로를 알아본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날 이후 둘은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했거든요.

엠마와 드뷔시가 한창 뜨거운 사랑을 즐기고 있을 때, 둘은 각자 결혼한 상황이었습니다. 둘이 함께하려면 각자 이혼하는 것이 먼저였겠지요. 그런데 이때 드뷔시는 또 한 번 과거의 실수를 반복했어요. 가브리엘과 테레제 로제에게 서로의 존재를 숨겼던 것처럼, 아내 릴리에게 엠마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어요. 결국 8월 릴리에게 일방적으로 결혼 생활을 끝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릴리와 함께 살던 집을 나와 파리에 새로 집을 구입했어요. 릴리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을 나온 거예요. 이때 파리 전역에는 드뷔시의 또 다른 스캔들이 퍼졌고요. 릴리는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몇 달을 버티다 결국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더 이상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을 거예요. 자신은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결혼을 해주었더니 고작 돌아온 것은 드뷔시의 변심이었으니까요. 드뷔시와 엠마를 향한 비난은 무척 거셌지만 둘은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1905년의 봄 그들은 결국 영국으로 피신했어요. 엠마와 그의 남편은 5월, 드뷔시와 릴리는 8월에 이혼에 합의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슈슈’라고 불린 드뷔시와 엠마의 딸, 클로드 엠마가 태어났고요. 이혼 후 자유로워진 두 사람은 다시 파리로 돌아와 함께 살았어요. 드뷔시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딸 슈슈와 함께요. 그리고 1908년 정식으로 둘은 법적 부부가 되었고요. 10년 후 드뷔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들을 고통으로 치닫게 했던 드뷔시의 삶. 만약 그의 역사에서 이러한 스캔들이 없었다면 그는 더 훌륭한 작품들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 반대일까요? 마지막으로 그가 친구였던 자크 뒤랑에게 1910년 6월에 쓴 편지를 보면 현실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했는데요. 그는 오직 음악 안에서 살아갈 수 있으며, 스스로가 드뷔시라는 음악가와 드뷔시라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는 내용을 보냈습니다.(드뷔시는 자신이 멋진(?) 음악가지만, 사생활 복잡한 남자라는 점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사회적인 음악가의 모습과 은밀한 사생활의 모습이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이 그가 우리에게 외치는 변명같이 들리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 정은주 (음악 칼럼니스트)

| 참고도서 '아주 사적인 예술' (추명희·정은주 공저·42미디어콘텐츠 펴냄)

저작권자 © 뉴스저널리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