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저널리즘 = 양인모 에디터] 누군가 혼밥을 하는 이들을 마치 소시오패스로 묘사한 바 있다. 혼밥이 만연한 시대를 현상으로 바라보며 자조가 섞여 있지만 그 ‘결여’를 대상이 아닌 화자에게 지운다는 점에서 나태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뭍사람들의 허기는 바다의 닿지 않는 것에 기원하고, 시인은 오늘도 말을 할 수 있는 핑계를 찾기 마련이다. 그것이 결여된 식탁의 풍경이라도 말이다. 

시인 정훈교가 새 시집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를 펴냈다. 그가 노래하는 혼자는 그림자를 좇아 해변을 걷고,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망설인다. ‘그렇다고 바다를 탓하거나, 노을을 탓하진 않았지 오히려 그 밤에도 새벽은 어둠보다 아침에 가까웠어’(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라며 씩씩한 얼굴이다. 그때와 같은 날을 거닐고 있는 시인은 가난하다. 그에게 혼자는 과거나 재난이 아닌 지금 움직이는 파도와 같다.

수신자는 말이 없다. 그는 이름을 호명하는 대신 ‘당신’이라는 대명사를 앞에 둔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당신이 이제 문을 닫았다는 당신의 빈자리가 늘수록 골목의 그림자는 더 짙게 눕는다’(당신이라는 문장을 읽다) 대명사는 전파처럼 허공에 맴돌고 되돌아올 뿐이다. 시인은 어쩌면 이름을 지우고 있다기 보단 대명사라는 빈 공간, 그 익명에 숨을 불어넣고 옷을 입히고 있는지 모른다. 그 옷을 입은 대명사는 ‘아침부터 와서는 소리 없이 갔다’(그해, 겨울)

인력(引力), 그러니깐 시인의 희망의 내용은 발신에 있다. ‘그 어느 때’를 상정하며 덜컥하는 무릎의 촉감을 앞에 세우지만 지난 풍경들에 애도를 표한다. ‘새벽잠, 부엌에서 물을 먹다가 문득 드는 왜 죽음 앞에서는 이런저런 의식이 많은 것일까’(‘문득이라는 말’) 그에게 죽음은 발신하지 않는 상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시인이 발신하는 당신이라는 대명사는 결국 독자일까. 수많은 전파 사이 도달하지 않는 시의 언어들은 전설로 남는다. 그의 말을 빌리지만 시라는 그림자는 이제 풍경으로서 기억으로서 아득할 뿐이다. 비가 와서 당신에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라고 말한 이들은 아직 그대로 있다. 우리는 그 식탁에서 도착한 것들을 하루 밤을 잡아 몰아 읽고, 숨을 들이 마시고,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시인 정훈교는 2010년 종합문예지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첫 시집 <또 하나의 입술>과 시에세이집 <당신의 감성일기>를 출간했다. 문화예술공간인 시인보호구역의 대표이며 청소년 독서 캠프, 옛마을 탐방 글쓰기 등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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