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원 (수원 갑)후보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김규용 기자)
김승원 (수원 갑)후보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김규용 기자)

[뉴스저널리즘=김규용 기자] WTO가 11일(현지시간)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로 인한 충격에 휩싸여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이러스의 공포는 곧 극복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현재의 공포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인류의 삶은 그럼에도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난 후의 국민의 삶의 방향과 그 질을 향상시켜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번 4·15총선은 대한민국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이러한 바이러스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을 대변할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4·15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각 지역의 후보자들은 지역민들에게 지역을 위한 공약을 내세울 시간도 없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고 있는 모양세다. 각 후보들은 선거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선 지역민을 대변하겠다는 사람이 지역민의 안전을 등한시 한다면 무엇을 대변하겠느냐며 지지유세보다 방역작업에 먼저 팔을 걷어 붙였다.

최근 수원 갑 지역의 민주당 대표주자로 김승원 후보가 이재준 전 수원시 부시장을 제치고 경선에 승리했다. 김승원 후보는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수원지방법원 판사출신으로 법조인이다. 또 지난 2018년부터 최근까지 청와대 대통령 정무수석실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김 후보는 지지를 호소하며 다니기도 바쁜 이 시기에 코로나19가 확산되며 지역민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독기를 들고 지역을 돌며 방역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 김 후보는 최근 자신을 지지하는 지지자들과 함께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자 “면 마스크 만들어 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는 코로나19가 비말감염(감염자의 기침이나 호흡을 통해 공기 중으로 전파되는 감염)이란 점을 착안했다. 그러면서 면 마스크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적극 알리고 환경적인 면에서도 효율적인 점을 알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홍보하기 위해 김 후보는 “김승원 캠프 면 마스크 제작 도전 - 믿어요 김승원!!”라는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를 통해 이를 알리며 코로나19 대처와 자신을 홍보하고 있다.

본지는 최근 국회의원 후보들을 찾아 정치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사람다움’이 먼저 선행되는 정치인이 선출되어야 나라가 더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후보들의 정치적인 능력과 함께 인간적인 면을 보고자 이번 총선의 후보들을 인터뷰 해보고자 기획했다. 그래서 후보들의 정치적 신념과 삶의 과정을 살펴보는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기로 했다.

김승원 후보가 지난 1월 12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열심이 뛰어다라는  장애인 대표에게 신발을 선물받고 있다(사진=김규용 기자)
김승원 후보가 지난 1월 12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열심이 뛰어다라는 장애인 대표에게 신발을 선물받고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다(사진=김규용 기자)

땀과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다는 진실을 배운 어린 시절

김 후보는 어린 시절 “저는 천상 농사꾼이었습니다.”라며 자신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를 따라 삽과 지게를 지고 논과 밭은 다니며 농사일을 거들곤 했습니다.”라며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는 것. 그러한 농사를 지었던 경험이 “파나 고추 등 다양한 작물을 키우며 그 재배법이 다르다는 것과 많은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라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작물의 재배법이 다 다르듯  람도 다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사람마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관심을 주어야 한다. 또 땀을 흘린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는 것을 몸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라며 성실함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학창시절은 어떻게 지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학창시절 제 별명이 ‘까만소’였습니다. 농사일로 까맣게 그을린 저를 수원 시내 쪽의 친구들이 놀리기 위해 붙인 별명입니다.”라며 웃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관계도 좋았다고 한다. 또 당시 중2시절에 시행된 교복자율화로 학우들의 빈부격차가 드러나며 위화감이 형성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렇지만 김 후보는 수더분한 성격으로 당시 친구들과 스스럼없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해 반에서 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대답을 통해 김 후보의 모습이 ‘옆집 아저씨’같은 모습이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사실 김 후보가 판사출신 변호사로 법조인 출신이기에 좀 냉담할 것이란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지역민들의 유세활동 중에도 마치 ‘옆집 아저씨’처럼 편안한 모습을 보인다고 말하는 지역민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학창시절 꿈이 바로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저는 목사님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주변 분들을 살피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목사가 되어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어보려 했습니다.”라고 자신의 어린 시절 꿈에 대해 설명했다.

효심으로 선택하게 된 법조인

기자는 목사가 되려던 꿈에서 어찌 법조인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했다. 이러한 질문에 김 후보는 겸연쩍게 웃으며 “사실 저를 낳으신 어머니께서 저를 태중에 잉태하고 계실 때 무릎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를 임신 중이셨기 때문에 독한 관절염 약을 드실 수 없다며 약을 끝까지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어머님이 아픔을 참지 않으시고 약을 드시기라도 했으면 제가 태어나지 못했거나 또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라며 당시 어머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며 “어머님은 제가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고 계셨어요. 아마도 당시 딸들에게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는 사회 환경에 의해 어머님이 더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님은 꿈이 ‘법조인’이었다고 합니다.”라며 “당시 저는 선생님과 아버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학대학을 가서 목사가 되려는 저를 눈물로 설득하신 분이 어머니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김 후보는 “어머님은 결국 제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관절염이 심해져 걷지도 못하시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어머님이 걸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집안에 누워계셔야 했고 당시 제가 병수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님은 그러한 상황이 되면서 웃음이 없어지셨어요. 그런데 제가 학교에 가서 100점을 맞은 성적표를 가지고 집에 와서 어머님께 보여드리면 그때나마 환하게 웃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말하며 김 후보가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이유와 법조인이 된 경위를 설명했다.

김승원 후보가 환하게 웃고 있다(사진=김규용 기자)
김승원 후보가 환하게 웃고 있다(사진=김규용 기자)

법에도 인정이 있듯, 사람들 사이에도...

법조인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었나를 기자가 질문했다. 김 후보는 판사로 재직시절 “법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법에 앞서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판결에 고심한 적이 많았다는 것. 그러면서 전주지법 판사 재직 당시 한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존속폭행치사의 건이 있었다. 고인이 된 피해자는 아내와 일찍 사별했다. 그리고 혼자 아들을 키우며 술에 의지한 채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그런데 고인이 알콜 중독으로 걸핏하면 아들에게 심한 폭행을 가했습니다. 어느덧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아들이 어느날 폭행하는 아버지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항하며 반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반격에 아버지가 건강상태도 엉망이었지만,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김 후보는 “이 경우 사건으로만 보면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며 이는 ‘존속폭행치사’로 형량이 무거운 중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면 아버지의 알콜 중독으로 어린 시절부터 고통을 받아왔고 더 이상 참지 못한 아들이 반격을 했던 상황을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사건만으로 보면 중죄임은 틀림없지만, 그 아들의 미래와 상황을 참작하여 중죄를 내릴 수 없었다.”고 설명하며 “법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람 냄새나는 문재인 대통령

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누구이며 이유를 묻는 질문에 김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2014년 당시 광화문에서 ‘인간 문재인’을 보았다는 것.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 아버님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광장에서 단식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런 ‘유민 아버님’에게 다가가 “단식은 제가 할 테니 유민아버님은 이제 단식을 그만 멈추세요.”라며 설득하던 모습이 가슴에 남았다는 것. 그러며 “국민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같이 아파하는 모습이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꼭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청와대 재직시절 보았던 문재인 대통령을 “온돌 같은 분”이라 표현하며 “거시적인 행동파지만 동시에 작은 것에도 섬세하게 아우르는 따뜻한 낭만주의자이다. 그리고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룬 참된 리더”라며 존경하는 이유를 덧붙였다.

김승원 후보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사진=김규용 기자)
김승원 후보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사진=김규용 기자)

김 후보가 정치를 선택해야 했던 필연적 이유

김 후보는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으로 재직했다. 당시 국민들의 복지와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많은 법안을 기획하고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던 중점법안들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아무리 좋은 법안을 만든다 한들 국회의원 몇이 어깃장을 놓거나 국회 비준동의를 넘어서지 못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당시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자, 김 후보는 직접정치에 참여해야겠다는 결심과 안타까움에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섰고 직접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이 되어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법안과 정책을 위해 필연적으로 출마하게 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김 후보에게 정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정치적 철학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김 후보는 “지역민을 대변하는 만큼 지역민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며 “정치인은 말을 잘 하는 것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김 후보는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지역민들의 목소리 듣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생각하는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국회의원이 만드는 법률과 정책은 국민은 살피기도 하며, 국민에게 제약을 두는 경우도 있다.”며 “정책목표만 보며 진행하다 보면 정책의 목표인 사람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이 정책의 대상이 바로 ‘국민’이라는 생각을 항상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김후보 강조했다.  

지역민의 고충해결과 지역민과의 약속

김 후보가 정치를 결심하고 현재 자신의 지역민을 대변하기 위해 무엇이 가장 급한 현안이라 생각하느냐를 물었다. 김 후보는 “제가 자란 이 지역은 아직 다른 지역에 비해 전반적인 인프라 측면에서 부족하다. 또 ‘주차부지’가 부족하여 주차시설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또 주민들과 특히 청년들이 문화·체육활동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하다.”며 이러한 시설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 후보는 “장안에서 나고 자란 저는 이 지역에서 많은 은혜를 입고 자랐다. 그래서 이제 좋은 정치인이 되어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지하고 응원해 주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도 많은 지원 부탁한다. 저는 최선을 다해 지역민들을 대변할 수 있는 지역민들의 스피커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인터뷰를 마친 김 후보의 책상 옆 벽에는 “‘지금’ 지금까지가 아니 지금부터, 수원의 희망 김승원”이란 문구가 붙어 있어 눈에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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