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창희 한세대학교수

 

 

시간과 존재는 있음과 없음을 반복한다.존재가 허무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존재한다는 의미는 벌써부터 죽음앞으로 달려나가고 있다는 의미와 상통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젊음, 생명,권리, 시간 등을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하곤 한다.

하지만, 언제나 늘 갖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언젠가 인생 최후로 주어지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은 확실하다. 

인류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이미 규정되어지고 이를 증명해 내려는 연역법적 사고나 개별적인 사실들을 조사하고 분석하여 최종적으로 결과에 이르는 귀납법적 사고와 경험적 사실과 축적된 지식적 확률의 가추법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하이데커가 말하였다.  

생각과 언어가 일치한다. 그러므로 말은 긍정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의미다.생각이 긍정적이면 언어가 긍정적이다. 

의심한다는 의미는 믿음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언어에 앞서 생각과 마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의심은 믿음으로 컨버팅시키는 전환기를 창작하는 서비스가 도래할 지도 모른다.

생각이 창조적이면 말과 행동이 창조적이 된다. 3차산업혁명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적 성격의 언어를 주로 채택하여 의사소통과 법리를 따지는 진술의 언어였다고 한다면,  이제 4차산업혁명시대에 살게 되는 인류는 생명을 완성시키는 창조적인 언어를 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이성적인 언어가 아닌 사물과 말하고 사물의 지능을 이해하고 통제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IoT세상, 스마트시티사회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빅데이터 광산에서 숙명적으로 살아야 하는  지구촌 한가족인 4차산업인, 스마트시티즌이 머지않아 시적인 언어, 예술적 언어, 홀로그램 같은 빛의 언어, 행동 연출같은 창조적인 언어로 시공자재로 쓰여지며 활약하는 모습들이 펼쳐질 것으로 예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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