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면서 제일 황당한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64쪽)

[뉴스저널리즘 = 알량한(필명) 에디터] 책 속에서 인용하고 있는 고(故) 황현산 선생의 트윗이다. 과연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확신할 만한 기준이 있을까. 스무 살이 넘었을 때? 경제적으로 자립했을 때?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가졌을 때?

저자가 말하는 ‘서울에 내 방 하나’는 어른임을 증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상징한다. 혼자서 일궈낸 첫 번째 자립의 공간. 저자는 그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킨 것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뒤이어 그 ‘어른의 조건’에 의문을 갖는다. 조건을 충족하는 것만으로 어른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다시 그 조건은 무엇을 근거로 정한 것일까. 
독립과 결혼, 취업과 출산... 소위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통과의례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타인에 의한 승인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어른이 됐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점점 어른처럼 보이는 데에 공을 들이게 된다.

영업을 해도 거래를 해도 어지간하면 나이가 많아 보이는 쪽이 유리하다. 그런 자리에서 실제로 민증 까고 확인할 일은 없으니 방점은 ‘많아 보이는’ 데 있다. (84쪽) 

어른의 조건은 타인의 시선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적어도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으로는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일찌감치 독립해 군복무를 마치고, 명문대를 나와 공중파 방송국 PD로 자리 잡은 저자의 경우는 누가 봐도 손색없는 어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자신이 어른임을 재차 확인하는 이유도 그 불안감 때문이다. 불안감은 스스로 어른스럽지 못한 느낌이 들 때마다 엄습한다.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과는 반대로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느낌은 좀 더 자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누구나 사회적으로 예외적인 위치에 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갑각류 알레르기라는 흔치 않은 질병을 가지고 있다. 서른 살이 넘도록 소위 말하는 ‘야동’을 본 적도, 술을 입에 댄 적도 없었다. 피부가 민감해서 뜨거운 밥공기를 맨손으로 잡을 수 없고, 로션도 골라 써야 한다. 웬만한 여자보다 길게 머리를 기른 그의 겉모습도 예외적이다. 지난 정부 시절 MBC에 몸담고 있던 저자는 언론탄압에 맞서 파업과 투쟁을 벌이다 부당해고를 당했다. 예능국 PD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모든 게 어른으로 승인받지 못할 위협이 된다. 이게 다 외부에 기준의 근거를 둔 탓이다.

저자는 점차 세상의 기준보다 자기 기준을 사수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스스로 선다는 의미의 자립(自立)이란 단어에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自)’였다. 저자가 책 속에서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스스로 겪은 것, 그리고 스스로 알게 된 것, 또는 남에게 배운 것을 자기 식대로 정리한 것들이다. 그는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사회인으로 자리 잡은 삼십대 중반의 자신을 스스로 어른으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취향이 생긴다는 건 독립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엄마가 사주던 옷을 곧이곧대로 입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 요새 애들은 이런 거 안 입는다고!” 소리 지르기 시작하면 어른이 되는 첫발을 디딘 거다. (188쪽)

겉으로 보이는 조건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오로지 나만이 나를 어른으로 판단할 자격을 갖는다. 저자는 후기를 통해 결혼과 이직이라는 새로운 일들을 겪었음을 밝힌다. 어른이 됐다고 여기는 몇 가지 조건들을 다시 통과한 것이다. 저자는 그 경험들을 ‘겪고 보면 또 별 거 아니라고 느끼는 일들’이라 일컫는다. 그는 어른이어야 한다는 오랜 강박에서 벗어난 것 같다.

진짜 어른스러운 건, 어른인 척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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