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서는 ‘놀았다’ 한마디로 끝냈더라도, 그림에서는 게임의 ‘출발’부터 ‘도착’까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20분은 놀 수 있도록 양쪽 펼침면 가득 복잡한 게임판을 그려 놓았다.”(94)

[뉴스저널리즘 = 박해민 에디터] 적어도 어린이에게는, 글보다 그림이 넓다. 글보다 그림에서 더 오래, 더 멀리 뛰어놀 수 있기 때문이다. 10권의 그림책을 그린 권윤덕 작가는 그 넓은 공간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림책이라는 놀이터로 뛰어 들어온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텅 빈 화판 앞에서 무수히 고뇌했다. 그림책마다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고, 다양한 주제로 아이들과 소통하고자 했다.

권윤덕 작가는 결코 대충 짐작하여 그림을 그리는 법이 없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변신’이다. 변신의 첫 번째 단계는 관심과 호기심이다. 일상적 계기든 우연한 기회든 관심을 끄는 무언가를 만난다. 두 번째는 집요한 관찰이다. 관심, 호기심을 끈 대상을 내내 머리와 마음으로 품는다. 대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공감과 이입이다. 불투명하게 어른거리던 것들이 어느 순간 분명해진다. 무엇을 그릴지, 그림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가 명료해지는 것이다. 마지막은 ‘되기’다. 그는 거리를 둔 채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되어’ 말하고 그린다. 그렇게 권윤덕 작가는 10번의 변신을 거쳤다. 

그의 변신에는 종종 고통이 뒤따랐다. ‘위안부’의 삶을 마주했을 때, 제주 4·3의 절망을 대면했을 때, 거대한 폭력 앞에 위태로웠던 5월 광주를 만났을 때마다 그는 아팠다. 그들의 고통은 곧 작가 자신의 고통이었다. 권윤덕 작가는 그들의 아픔을 멀리서 지켜보며 동정하는 대신 그들과 하나 되어 아픔을 나눴다. 그리고 그 아픔에서 피어난 희망을 그렸다. 극한의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삶, 인간의 선함, 공동체 정신을 그림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아들이 유년기를 보냈던 시골집의 정겨운 풍경과 온갖 사연이 깃든 옷 이야기에서 시작한 그의 그림은 아이들의 놀이, 생명을 품은 제주 해녀와 그의 딸, 소녀에게 용기를 주는 고양이, 노동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동물과 어린이의 교감을 거치며 점차 확장되었다. 개별적인 것에 대한 깊은 관심은 개별적인 것들이 놓인 사회구조를 질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의 변신이 윤리적인 이유다. 윤리란, 고립된 개별자의 관계망을 확장하는 것이다. 확장된 관계는 개별자의 역능을 증폭시키며 우리 모두의 발걸음을 진전시킨다. 경직된 사회구조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던 개별자는 옆에 있는 또 다른 개별자와 손잡고 공감함으로써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부풀리는 고양이를 보고 용기를 얻는 소녀(권윤덕의 책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처럼 말이다. 

그림책으로 세상의 윤리를 확장하는 것은 곧 작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그 역시 위태로운 삶의 순간들을 넘겨왔다. 하지만 그 상처를 제대로 마주하지는 못했다. 당장 나의 도움과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조직이 있었기에 자신의 아픔에 집중할 수 없었다. 타인과 사회에 대한 부지런함이 스스로에 대한 게으름으로 귀결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내 내면의 이런 간극은 그림책을 한 권, 한 권 만들면서 조금씩 좁혀졌다”(153)고 말한다. ‘되기’의 변신을 거치며 타인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가 겹치고 포개짐을 깨달았고, 타인에게 공감하며 윤리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도 보듬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권윤덕 작가에게 그림은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 이타심, 타인과 내가 함께 나아가는 이타심의 믿음직한 토대다. 윤리보다는 도덕에, 공감보다는 무관심에, 소통보다는 독단에 무게추가 기울어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권윤덕 작가의 윤리적 변신은 흐름을 거스르는 하나의 ‘사소한’ 계기를 제공한다. 이 계기가, 작가의 그림책이 아이들에게 그러했듯, 우리 모두에게 변신의 윤리를 자각시키고 윤리적 변신을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동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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