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저널리즘 = 박해민 에디터] 나는 출판편집자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원고를 읽고 또 읽는다. 오탈자를 잡아내고, 맞춤법을 교정하며, 문장을 다듬는다. 퇴근 후에는 후다닥 밥을 차려 먹고 내가 만든 책이 아닌 내가 산 책을 읽는다. 책 읽기가 너무 싫을 때는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를 본다. 가끔 친구를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와 술을 마시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권남희 번역가의 에세이집 『귀찮지만 행복해볼까』를 읽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내 삶이 에세이라면 어떤 느낌일까? 에세이로 쓰인 내 삶을 다른 출판편집자가 교정, 교열한다면 어떤 문장을 카피로 뽑을까? 디자이너는 무슨 색으로 표지를 고를까? 표지에는 어떤 일러스트가 들어갈까? 질문을 던지다 보니 조금 씁쓸해졌다. 무채색의, 어딘가 칙칙한 분위기의 에세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르다.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 “언어의 투명한 마디마디를 짚는 재밌는 문장들”이라는 카피가 잘 어울린다. 책을 읽는 내내 피식거리다가도 종종 등장하는 깊이 있는 문장에는 한참을 머무르게 된다. 밝은 노란색과 아기자기한 표지 디자인은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저자의 말마따나 그는 학창 시절에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번역가가 되어 수많은 책을 번역했지만,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너무 무서워서 들어오는 강연 요청은 모조리 거부했다. 무례한 편집자에게 참다못해 일침을 날린 후, 금세 마음이 약해져 안절부절못한 적도 있다. 수많은 번역가 지망생이 그를 보고 꿈을 키웠고 여전히 키우고 있지만,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러 가는 날에는 온종일 들떠 있다(그러다 딸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권남희 번역가는 나보다 더한 “집순이”다. 그렇다고 집에 번듯한 작업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평소 집 밖을 벗어나서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 참고로 내 작업 공간은 이렇다. 책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주방, 오른쪽에는 거실, 앞에는 텔레비전, 옆에는 소파, 발밑에는 멍멍이. 주부미(主婦美)가 철철 넘쳐 난다.”(112-3)

엄마이자, 집순이자, 가장이자, 번역가인 권남희 번역가는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에서 속 깊고, 유쾌한 이야기를 술술 뽑아낸다. 그녀가 왜 ‘따뜻한 번역’으로 독자에게 사랑받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특별한 삶에서 의미를 끌어오는 사람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끌어오는 사람이다. 

책을 다 읽었을 때 쯤, ‘내 삶이 에세이라면?’이라는 생각에 침울했던 기분은 싹 사라졌다. 이 책의 표지처럼 밝은 노란색으로 은은히 빛나지는 않겠지만, 에세이에는 일과 삶에 대한 나의 자부심이 묻어날 것이기에. 누군가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삶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방, 거실, 텔레비전, 소파, 멍멍이 사이에 앉아 번역을 하는 권남희 번역가의 삶이 빛나듯, 내 삶도 빛난다. 내 삶이 에세이라면, 무채색의 칙칙함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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