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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과 친일파와의 관계성... "국민을 위한 대통령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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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과 친일파와의 관계성... "국민을 위한 대통령은 없었다."
  • 김규용 기자
  • 승인 2020.06.23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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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숨기거나 왜곡되어져서는 안 된다.
과거사를 숨기는 것은 자신이 가해자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국민에게 위임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자는 국민이다.
보도연맹원증이다.(출처=진실화해위원회보고서)
보도연맹원증이다.(출처=진실화해위원회보고서)

국민보도연맹은 친일파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은 민족이 분단되며 남·북으로 각기 나라가 수립되며 앞으로 비극이 예고되고 있었다. 강대국에 의해 강제이다시피 나누어진 민족적 분열은 권력에 눈이 멀었던 자들이 주축이 되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를 외치며 통일된 한나라가 아니면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군정에게는 김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정치 불출마 선언에 대해 쌍수를 들어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에게 민족적 지도자로 추앙받던 김구의 정치 불출마는 우리민족에게 엄청난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김구의 부재 속에 미군정과 친일파를 등에 업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일본의 패망하자 친일파들은 “어찌 이런 일이,,,,,,.”를 외치며 숨어들었으나 뜻밖에 미군정은 자신들을 등용했다. 정부가 수립되자 민족주의자들은 국민들의 요구를 담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친일인사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친일파를 정치적 기반으로 가지고 있던 이승만은 이들의 조사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특위가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측근인사들이 조사대상이 되고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해체하기 위해 갖은 정치적 모략을 실행했다. 그리고 친일파와 이승만은 친일파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돌리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다.

이러한 국민적 공분을 돌리기 위해 탄생한 것이 바로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이다. 친일에 대한 국민의 공분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테러를 자행했던 사회주의자에게로 방향을 틀게 만든 것이다. 보도연맹은 1949년 4월에 당시 반공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 검사의 제안으로 친일파 경찰간부와 친일인사의 적극적인 협력 하에 탄생했다. 보도연맹을 탄생시킨 후 2개월도 안되어서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해체시켰다. 그리고 바로 김구가 암살되며 친일파 청산요구에 대한 국민적 구심점이 사라졌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자들이 모두 “빨갱이”라며 원색적인 색깔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했다.

서대문구 보도연맹원의 사진과 조직도.(출처=진실화해위원회보고서)
서대문구 보도연맹원의 사진과 조직도.(출처=진실화해위원회보고서)

국민보도연맹의 확장은 대국민 학살을 예고하고 있었다.

반민특위가 사실상 습격을 당해 유명무실해지자 이들은 보도연맹을 광범위하게 확장하며 연맹원수를 늘렸다. 최초 사회주의자의 사상을 전환시켜 자유민주주의 시민으로 만든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의도가 무색하게 사회주의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을 가입시키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연맹원에 가입하면 비료나 각종혜택을 주겠다며 가입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가입되어진 경우도 많았다. 또 사람과 사람간의 불화가 싹이 되어 상대도 모르게 가입시키는 등 무작위로 가입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당시 연맹을 관장했던 검찰과 경찰의 주요간부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시까지 연맹원의 규모가 30만에 육박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관변단체 연맹원이니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을 모두 집결시키고 구속했다. 갑자기 구속된 상황에 어리둥절했을 이들에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은 전쟁발발 이틀 만인 1950년 6월 27일 새벽에 대국민 방송을 녹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북한군이 막강한 전력으로 남하하며 27일 새벽 1시경 북한군의 탱크는 의정부에 들어섰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새벽 2시경 급하게 경무대를 빠져나와 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도망쳤다. 그리고 너무 많이 내려온 것을 인식한 이승만은 다시 대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후 이승만의 행보는 무능과 이기주의의 끝을 보여줬다.

국민보도연맹원 희생자 실태(출처=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국민보도연맹원 희생자 실태(출처=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국민은 안중에 없던 이승만 정부의 만행

이승만이 대전으로 도망친 몇 시간 후인 오전 11경 공보처에서는 전황과 반대되는 방송을 시작했다. 공보처는 “의정부로 침투한 북한군이 국군에게 대패하여 탱크를 버리고 북으로 도주하고 있다.”고 알린 것이다. 이러한 국민을 기만하는 사기극은 몇 차례 반복하며 방송으로 내보냈다. 이후 이승만은 직접 담화문을 통해 “미군이 참전하기로 했다. 또 미군사령부가 서울에 차려진다. 그리고 수도서울은 이전하지 않는다.”등의 내용을 방송했다. 그러나 공보처의 국민 기만방송 후 이승만의 발표는 마치 수도서울이 안전하니 동요하지 말라는 것으로 국민들은 인식했다.

당시 우리나라를 취재하던 AP통신원의 말에 의하면 “이날 방송으로 피난하려던 시민들은 국군이 사령부를 이전하는 것을 보면서도 안주하였다. 저도 이승만과 정부 요직인사들이 아직 서울에 남아있는 것으로 알았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대전으로 도망친 이승만이 이날 방송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오히려 28일 새벽 1시경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북한군을 피해 시민들이 피난하던 한강 인도교를 새벽 2시 반경에 폭파했다. 이때 다리위에 피난하던 시민들 1,000여 명과 늘어섰던 자동차들이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당시 작성된 처형자 명부(출처=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당시 작성된 처형자 명부(출처=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10만여 명의 국민을 학살한 ‘대통령 긴급조치’

이후 정부요직 인사들은 한강인도교 폭파는 적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전쟁 상황에서 적의 진주를 막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다고 백번을 양보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폭파 전에 다리를 폭파하니 넘어오지 말라는 방송정도는 했어야 옳았다. 이러한 행태는 국민은 어찌되었던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의식이 결국 정점에 달한 사건이 바로 보도연맹학살사건이다.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오전에 이승만은 ‘대통령 긴급조치’를 통해 구속수감 되었던 보도연맹원에 대해 ‘즉결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이들이 아군의 전황이 불리해지면 북으로 전향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보도연맹원은 전쟁발발과 함께 아무 영문도 모르고 구속된 연맹원을 법적인 절차도 없이 ‘즉결처형’ 했다. 이 집단적 학살은 전국적으로 일어나며 국민 10만여 명이 무참히 학살됐다. 학살은 주로 경찰과 육군정보국, 우익청년단체 등에 의해 실행됐다. 관계자에 따르면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눈에 가리개를 씌운 채 나무에 묶고 총살했다. 그리고 총살한 이들을 파놓았던 구덩이로 던져 넣고 구덩이를 묻어버렸다.”고 증언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50여구 정도씩 시체를 장작더미에 쌓고 소각하여 증거를 인멸했다고도 증언한 바 있다. 이렇게 많은 국민을 대량 학살한 이승만이 과연 자신의 말처럼 대한민국과 국민을 사랑했을까하는 의심을 멈출 수 없다.

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자료(출처=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자료(출처=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과거사 반성이 중요한 이유

이렇듯 역사적 사건들은 서로 연관이 없는 것으로 인식해 단지 사건만을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건들 사이에는 친일파 청산이 되지 않은 결과 보도연맹학살과 같은 인과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사건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도 존재한다. 이승만은 집권하는 동안 이러한 과거사를 철저히 숨기고 역사를 왜곡하며 자신의 치적만을 내세웠다. 4·19 혁명이라는 국민적 권력회수에 이승만은 장장 22년여를 집권하던 나라를 버리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반성되지 않았기에 또 다른 독재자의 등장은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지나간 과거사에 대해 덮어버리고 싶어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과거사에 대해 국민적 이해와 합의가 되지 않으면 마치 “살 속에 자라고 있는 종기”처럼 된다. 이는 보이지 않아 당장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결국 살을 썩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종기는 종류와 위치에 따라 결국 죽음을 불러오게 만들 수 있다. 이처럼 과거사의 정리는 행위자의 사과와 국민적 용서가 필요한 중요한 것이다.

과거를 들춰서 지난 아픔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아픔을 준 당사자의 철저한 반성을 이끌어야 다음 사람이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 이후도 우리나라는 역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피를 제물로 삼았다. 반성되지 않은 과거사는 반드시 반복된다는 것을 우리 근대사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과거사를 청산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이때 반드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져 온 국민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익을 위해 만들었던 선입견들을 버리고 국민이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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