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저널리즘 = 박해민 에디터] 소설에는 두 개의 서사가 교차한다. 첫 번째는 「제국의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맞다.) 저자가 쓴 페이스북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른 대학 교수의 서사다.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지만, 교수는 이내 이 사건이 그리 녹록치 않은 일임을 알게 된다. 호기심을 느낀 그는 ‘위안부’(소설은 “위안부의 위안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군의 시각이므로 따옴표를 쳐야 한다는 합의가 학계와 시민운동 진영에서 이루어졌다.”(93)고 적는다.) 공부를 시작한다. 

두 번째는 교수와 그의 여성 제자 혜린의 서사다. 교수는 ‘위안부’ 공부 중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불쑥 혜린에게 연락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쏟아낸다. 혜린은 그런 교수가 불편하다. 교수가 밑도 끝도 없이 연락해서 다짜고짜 ‘위안부’에 관한 질문을 쏟아내는 것도 싫고, 취업, 외모, 남자친구에 관한 질문을 퍼붓는 것도 싫다. 물론 교수 입장에서는 ‘애정 어린’ 질문이었겠지만.

교수는 스승과 제자,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중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있지만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한다. 혜린은 그런 그에게 점차 진저리를 치고, 결국 둘 사이의 일은 학교 성평등센터까지 전해진다. 

교수는 당황스럽다. 화도 난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왜 ‘선의’로 시작한 모든 일들이 점점 꼬여만 가는 걸까? 교수는 고뇌하고 또 고뇌한다. 그리고 외친다. “그래! 알았어!” 

소설은 교수가 ‘깨달음’을 얻는 여정을 좇는다. ‘위안부’를 윤리적으로 연구하고 재현하는 일부터 일상에서 여성이 겪는 불안과 수모의 문제까지. 교수는 거대한 정의와 일상의 정의가 다르지 않음을 조금씩 배워나가며 새로이 거듭난다. 일종의 페미니즘 계몽소설인 셈이다.

하지만 교수의 깨달음은 어딘가 미심쩍다. 그는 “문체가 온건”한 “기독교 페미니즘” 서적에서 “구원”(259)을 얻는다. 성욕, 강간과 같은 무서운 단어가 넘쳐나는 페미니즘 도서를 읽으면서 받은 거부감, 불편함을 이 책에서는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그는 “그래! 알았어!”라고 외치기 직전, “우선은 말을 잘못해서 혀를 잘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299)을 한다. 이제 분명해진다. 그가 깨달은 건 페미니즘의 정의, 윤리가 아니다. 그는 페미니즘을 적당히 받아들이는 방법, 페미니스트에게 욕먹지 않는 법을 깨달았을 뿐이다. 

왜 소설이 깨달음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채웠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작가가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방식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난생 처음 페미니즘을 접한 남성의 혼란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오래전부터 불평등한 젠더 권력 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페미니즘 지식, 담론, 운동, 실천의 결은 많고 그 깊이도 깊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생산물은 그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였다.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악의적인 조력 하에 권장되어 왔다.

때문에 페미니즘의 변화 요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한국사회는 이제야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마주하는 중이다. ‘갈등’ 운운하는 건 적절치 않다. 이는 변화를 수용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의 문제다.

이 거대한 변화 요청 앞에서 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 이를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놀람과 무서움 이후,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의 세계에 안전하게 머무르기, 변화에 동참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그리고 그 중간의 어딘가를 배회하기. 

소설 속 교수는 세 번째 길을 선택한 것 같다. 그는 겉으로는 변화를 수용하는 듯 보이지만, 내면에는 여전히 페미니즘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품고 있다. 소설에는 그가 보신주의의 관점에서 행동과 생각을 교정해나가는 장면이 수두룩하다. 보신주의적 접근은 변화에 동참하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문제’가 생기는 것은 원치 않는 자가 내리는 비겁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교수의 깨달음이 더 확장될 가능성은 없는 걸까? 나는 교수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그는 어설픈 정의감으로 행한 행동이 어떻게 또 다시 ‘위안부’ 피해자를 타자화했는지를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혜린이 자신에게 느꼈을 불안과 불만을 인지하고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출발점 삼아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불쑥불쑥 거부감과 분노가 솟구치긴 하지만, 공부하고 변화하겠다는 교수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그의 부끄러움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적대하는 말과 젠체하는 거짓말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놀람과 무서움을 솔직히 고백한 후, 변화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남교수. 나는 소설 속 교수에게 희망의 가능성을 독해해 내기로 마음먹었다. 변화 요청에 어정쩡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서 조차 희망의 가능성을 읽어내야 하는 건 페미니스트들이 짊어진 부당한 의무지만, 그래도 희망을 말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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