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실천문학
사진=실천문학

 

[뉴스저널리즘 = 양인모 에디터] 마음이란 늘 떠다니며 잡히지 않는다. 그래 결심했어, 라는 세기말 유행했던 말은 이제는 더욱 멀게 느껴진다. 결심에는 그것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일종의 희생을 담보한다. 그런 면에서 시인은 늘 갈등하는 쪽에 가깝다. 무얼 쉽게 결단시키지 못하며 세속에서 규정과 판단으로 너덜해진 이들의 본래 이름을 다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아프기 십상이고, 그들의 일은 본래의 이름 그대로 제대로 호명하는 것이다. 

성배순 시인이 새 시집 ‘세상의 마루에서’를 펴냈다. 시인에게 ‘세상’은 ‘세살베기 아기 어른거리는’(천사의 눈) 곳이며 ‘마루’는 ‘조금씩 읽히기 시작하는 눈빛, 손짓, 몸짓의 언어들’(우리는 순한 짐승이 되어)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선 누굴 겨냥하거나 쏘아붙일 순간에도 당장의 말은 입 안에 감추고, 누구나 생의 최초의 순간에서 했던 것처럼 빛과 짓만을 내보인다.  

시인의 손가락은 늘 움직인다. ‘시리아 난민입니다. 도와주세요’란 말에 자동으로 ‘지중해 건너다 배 뒤집혀 터키해변 모래 속에 엎어져 있던 아기’가 떠오르고 주머니 속 1리라를 만지작거린다. 그의 손가락 감촉에는 떠다니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건 1리라를 줄까 말까, 가 아닌 옅게는 저 아이를 데려와 기를까, 하는 갈등이다. 이는 그의 마주선 두 손에 기원이 있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손을 모으던 나는, 내 작은 다락방에서 고개를 숙인 채 마음속을 항해 두 손을 모았지’(한때 나는 야훼의 딸이었지) 부재 속에 ‘문득 종소리 귀울림이 흔들흔들 내 균형을 잡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를 쓰고 있으니 시인이겠지. 그에게 시는 ‘개의 불성에 대해, 부처와 예수의 욕심에 대해 갑론을박하다가 우리는 개만도 못하다며’(절 옆에서 고기를 굽다) 자조하는 것인 동시에 긴 여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바다(터키 불루, 나의 글루밍 선데이)를 건너고, 산(토르스 산맥을 넘으며)을 지나 떠다니는 마음에 대해, 영혼에 대해, 이승의 아픈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온몸 가득 커다란 돌멩이를 매달아 바다 깊은 곳에 밀어 넣자고 이야기하는 시인의 마음에 다시 종소리가 들릴까.  

앗아먹은 사람들 꿈을 날숨 통해 차츰 밖으로 내보내더라....(...)...꿈을 좇아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였더라. 이곳 인간의 마루는, 그로부터 세상의 마루가 되었더라. 
- 세상의 마루에서 

꿈과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마루. 그곳엔 늘 시인이 있다. 생의 최초의 몸짓과 꿈, 어른거리는 1리라 동전과 흔들흔들 눈동자에 종소리가 울린다. 이들이 모이는 마루를 찾아 간다면 그에게 길을 물어보도록 하자. 그리고 언젠가는 그의 손을 잡고 그 모든 손을 모아보자. 

저작권자 © 뉴스저널리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